친퀘테레와 밤의 피렌체
친퀘테레에서 오롯이 맞이하는 여유로운 아침. 5시간 가량을 잤을까. 이탈리아에서 신기하게도 잠을 극히 적게 잤는데도 금방 깨어나고 피로감을 심히 느끼지 못했다. 어제보다는 푹 잔 기분에 산책까지 나설 힘이 솟는다. 자고 있는 친구들 뒤로 간단히 정돈을 마치고 잠옷 바람으로 (물론 운동복이기도 하다) 아침 산책을 나선다. 숙소가 거리의 끝 쪽이라 금방 보이는 해변과 이른 아침부터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현실감이 없다.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 짐을 챙겨 나가야 하니 오래 걸을 계획은 없었는데 지나치는 풍경들이 무척 아름다워 (그만큼 인파도 상당했고 끔찍히도 더웠지만) 올드타운까지 걸어버렸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짐을 챙겨 나왔는데 짐 보관함을 찾지 못해 헤매느라 체력이 금방 동이 나고야 말았다.
이 짐을 들고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세탁소에 쌩뚱맞게 짐을 겨우 맡기니 (본래 보관하는 약국 같은 곳이 이미 자리가 가득 차서 대안으로 간 곳이었다) 짐을 맡기러 이리 저리 움직인지 이미 1시간이 지나가고 있어서 해변이 보이는 식당의 자리에 무턱대고 앉았다. 튀긴 해산물과 맥주가 들어가자 체력이 다시 충전된다(당연하게도 맛있었다).
소화를 시킬 겸 아침의 산책로를 친구들과도 함께 동행한다. 다녀왔던 행선지를 그대로 걸으며 신비로운 묵주 팔찌도 눈에 담고 (이후에 해수욕을 하다가 거친 파도에 기존의 묵주를 잃어버렸으니 눈에 아른거리면 사야합니다..) 여행을 잘 다녀오라 말해준 이들에게 줄 제노바식 바질 페스토가 다긴 조그마한 유리병도 기념품으로 사서 금새 두 팔이 기분좋은 무게로 가득 찬다.
카페인이 필요하기도 하고 걷자니 정오의 볕에 금새 더위로 녹진해져 다시 해변가로 걸음을 재촉했다. 한 카페에서 사케라또를 테이크아웃해 파라솔을 빌리려는데 마침 일광욕을 하기 좋은 시간대라 그런지 자리가 없단다. 무계획형인 우리의 흐르는 시간을 모르고 게을리 보낸 탓이긴 하지만 이 또한 여행의 한 순간이려니 어쩌겠나. 그 이후로도 몇군데 허탕을 치고는 임시방편으로 모래사장에 깔아둘 비치타월과 우산을 급히 사서 모래사장의 아무 곳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이미 그곳도 만석이었지만 어거지로 자리를 만든 덕분이었다. 그마저도 파도가 깊이 들어오면 금새 자리가 젖어버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마땅한 샤워시설도 없고 물에 젖으면 골치가 아플 것 같아 발만 담글 요량으로 나머지 시간은 일기를 쓰거나 책을 읽으려 킨들과 일기장을 무겁게 가방에 담아 다녔는데 일단 몰아치는 파도가 꽤 높아서 발만 여유롭게 담글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 얼마 들어가지 않아도 금새 바닥이 깊어져 아예 발이 닿지 않는 구간이 금방 드러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더위에 대비되어 피부에 닿는 시원하고 에메랄드 빛의 영롱한 바닷물에서 그저 발만 참방이고 싶지 않아 결국 거하게 물놀이를 해버렸다. 한 두 차례 파도 공격을 받고 나니 얼굴 전체가 젖어버려 그야말로 생쥐 꼴이 되었지만 오전부터 이리 저리 치인 우리 셋의 누적된 피곤을 단번에 날아가게 해준 청량한 순간이었다. 파도만 타도 충분히 스릴 있는 물놀이었다. 이날 얼마나 얼굴이 그을렸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성의 없이 놓여진 훤히 뚫려 있는 몇 줄기의 흐르는 물에 의존해 몸에 남아있을 진흙과 소금기를 대충 털어내고 즉흥적으로 기차를 타 친퀘테레Cinque terre를 검색하면 으레 나오는 절벽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을 보러가기 위해 마나롤라Manarola로 향했다. 사람은 많고 기차는 밀리고 (기차 안에서 유모차에 앉아 우리를 향해 Bella! 라 외치던 아이가 고단한 기다림을 잠시 잊게 해주긴 하였다만) 보려했던 장소는 찾지 못해 엉뚱한 곳을 잠시 오르다 다시 내려오기는 했지만, 우연히 눈에 들어온 식당의 간판 속 샌드위치가 무척 맛있어 보여 이미 문을 닫으려 한다는 주인도 우리가 무척 지쳐 보였는지 (물놀이를 마치고 선크림만 위에 덕지덕지 바른 꼴이니 충분히 그럴 만 했을 거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가능한 재료들로 주문할 수 있는 음식들을 알려준다. 바깥의 자리에 앉아 잠시 전망을 보고 들어오니 옆자리에 친구 둘과 옆 좌석에 앉아 있던 할머니들과 할아버지 일행이 이미 친구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탈리아에 가볼만한 곳을 얘기하다 (이분들은 남부에서 거슬러 올라오는 일정을 하고 계셨다) 갑자기 딸 내외의 사진과 손주 사진을 자랑스럽게 이방인에게 꺼내보이는 모습이 우리네 어르신들과 다를 바 없어 손주 사랑은 만국 공통인가 싶어 사랑스러웠다. 바깥에 나 있는 테라스의 의자에 다리를 올리고 나른히 앉아있는 이들과 5시 정도만 되었는데도 장사에 대한 열의가 전혀 없이 여유롭게 문을 닫는 상점들의 느긋한 모습으로 이 곳을 기억하게 될 것 같다.
다시 돌아와 세탁소에서 짐을 찾고 (귀여운 고양이도 잠깐 인사한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 하는 한 친구와는 작별을 나눈다. 따지고 보면 오랜만이었는데도 잘 지냈냐는 흔한 안부 인사 없이 곧바로 그황을 물었던 첫 날부터, 헤어질 때도 요란함 없이 담백하게 손을 흔든다. 머지 않은 훗날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상호의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으리라. 다른 친구와 나는 피사로, 그리고 그곳에서 환승해 피렌체로 향하는 기차를 반대편 승강장에서 기다렸다. 네 자리가 마주 앉아 있는 좌석에서 무엇이 그리 기쁜지 연신 깔깔대는 소녀들 앞에서 친구가 사온 해산물 튀김과 이탈리아 맥주 캔을 개봉한다. 식어도 이 곳의 음식이 맛있다는 건 여전히 유효하다. 피사로 향하는 앞 열차가 상당히 지연되어 결국 피렌체로 향하는 다음 열차는 결국 놓쳤다. 뭐, 이만하면 열차 지연 귀신에 씌인 듯 싶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착 공격을 당하니 마음은 초연해지나 녹진해진 몸은 적응을 못한다. 예정보다 1시간 늦게 피렌체에 도착한 이제는 익숙해질 지경인 혼란한 이탈리아 열차에서 몸을 내렸다(심지어 뒷 열차는 새로이 예매하지도 않은 채 오는 열차를 아무 것이나 탔다. 평생 할 무임승차를 이 곳에서 다 하고 간다).
여전히 꽉 찬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보름달에 어두운 빛에도 고풍스러움이 보이는 건물들이 피렌체의 첫 인상이다. 버스를 타고 10분여 가서 다시 10분 정도 골목을 걸으니 예약한 호스텔이 나온다. 도미토리 룸에는 사람이 거진 꽉 차 있었지만 반면 조용했다. 너무 늦은 시간이어서 그랬으리라. 대강의 짐만 정리해두고는 가볍게만 챙겨 밤거리를 나섰다. 마침 토요일 밤이라 그랬는지 거리에는 주말의 밤을 즐기는 시끄러운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한 골목의 바에서 활짝 열어놓은 문을 사이로 로맨틱하게 울려퍼지는 오페라 곡의 라이브도 우연히 듣는다. 맥주를 한 속씩 들고 Old bridge가 보이는 강가의 다리에 앉아 있는데 피렌체에서 문득 파리를 장소로 한 <미드나잇 인 파리>가 엉뚱하게도 떠올랐다. 그러기도 잠시, 자신을 거리의 화가라 소개하는 나이 든 남자가 자연스레 말을 거는데 그것이 꽤나 길어져 쌀쌀한 밤바람이 여과없이 살에 스며들기까지 이어졌다. 기약없는 다음을 약속하고 숙소로 돌아와 공용샤워실에 이름모를 외국인들과 씻고 있자니 나의 지금은 어디까지 왔고 어디로 향할지 문득 방향감을 잃는다. 시원한 물로 제대로 된 샤워를 하니 대낮의 해변가에서 미처 씻겨내려가지 않은 바닷가의 징표들이 요란스럽게도 빠져나온다. 여행이란 무언가 혹 같은 걸 달고 오는 것, 빼내려 해도 진득히 달라붙는 것들을 기어이 떼내려고 하는 과정의 연속 같다는 이상한 상념에 든다. 이 또한 알코올의 영향이려니 치부한다. 2층 침대에 앉아 생각을 끝까지 소진하려 일기장을 꺼내 사각사각 쓰는, 이탈리아에서의 마지막 날 밤이 이렇게 채워진다.
외국체류 시작 (2021. 9. 17. ~)으로부터 +358일.
브런치북 첫 연재일로부터 +49일.
주의사항: 언제 이 체류가 종료될 지는 모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