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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몬트 Oct 18. 2024

데이트립의 루틴

나에게 선물하는 하루치의 쉼

5월의 마지막 날. 연휴도 있었고 그 사이 수업도 없다 보니 긴 휴일을 지난 것 같다. 이번 학기 치러야 할 헌법 구술시험을 조금 당겨보고자 강사님께 미리 연락을 드렸던 터였는데, 아무래도 시험은 학기 말에 치를 것 같다. 그래도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필기시험을 치라고 하시지 않으니 다행인 건지.. 석사논문 주제를 정해야 하는데 -라고 생각만 하고 실행은 좀체 되지 않는다. 6월 중으로는 정말 잡아야 할 텐데, 이마저도 말뿐이 될지는 두고 봐야겠다. 아무튼 이번 연휴 동안의 소득은, 헌법 시험 준비를 한 것이 유일했다. 


화창한 날이 이어지는 요즘을 책에서, 그리고 책상 앞에서 멀어지게 하는 핑곗거리로 삼는다. 걷기에 좋은 하루하루가 지속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힘차게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금세 몸에 더운 기운이 오르며 인중에 땀이 차오르곤 하지만 이러다 정말 여름이 미뤄지지 않고 올 것만 같아 당분간 봄과 여름 사이의 이 날들을 부지런히 걸어야겠다. 


어젠 D가 전화가 와 산책 중이었다며 스웨덴의 풍경을 보여준다. 친구를 보러 다시 스웨덴으로 가면 좋을 텐데··· 생각을 하다 S가 자신이 있는 아프리카로 놀러 오라는 제안이 갑작스레 떠오르고, 꿈꿔왔던 순례길을 그럼 미룰까, 아니, 미룬다는 말이 당초 성립될 정도로 뭐가 정해져 있기라도 한가 자조 섞인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지난 겨울 방학 끝자락에는 여름에 꼭 한국으로 가 부모님과 친구들을 보고 와야지 다짐을 했는데 지금으로서는 앞날이 그저 까마득하고 매일 매일 쳐내야 하는 캘린더성 일들이 한 달 단위로 채워질 뿐이라 먼 미래의 일을 계획하는 데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중간 중간 나를 환기시킬 만한 것들을 찾아야 한다. 이를테면 어젯밤 즉흥적으로 정한, Regensburg로 향하는 오늘처럼 말이다. 여행을 할 때는 바로 다음 행선지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당장의 일만을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그 외의 고민과 생각들은 끼어들 틈이 없다. 



그간 세미나 준비와 곧바로 학기의 시작, 다시 세미나 발표를 준비하느라 (매일 매 순간 최선을 다한 것은 아니었으나..) 다른 도시에 다녀올 여유가 좀처럼 없었다. 아직 하나의 시험을 앞두고는 있으나 데이트립은 꾸준한 공부에 그리 방해가 되지는 않으리라는 자기 합리화가 원동력이 되었다. 아침 일찍 나서는데, 요즘 49유로 티켓이 한창이라 기차에서 설문을 받기도 했었다. 오랜만에 타는 기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만으로도 이리 설레다니! 논문을 읽다 보니 지나가는 단조로운 풍경은 잊히고 금새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에 도착했다.


사실 데이트립의 가장 큰 목적은 발할라에 다녀오는 것이었는데, 페리가 마지막 타임(이 낮 2시 반이라니...)이어서 발할라에 정차하지 않고 둘러 오는 배였다. 뭐, 이렇게 아쉬움이 쌓여 다시 길을 떠나는 데 이유가 되어주지 않을까. 어차피 하차하지도 못할 거, 마음을 내려놓고 눈부시도록 푸른 도나우 강을 실컷 눈에 담았다. 맥주는 덤. 이방의 도시를 다녀올 때마다 그 지방의 원두를 사 오는 것은 이제 내 여행의 루틴이 되었다. 지역의 특산 맥주나 와인을 마시면 더 좋고. 식사는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뒤 음식이 내 여행에 크게 좌우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날도 생각해 보면 한 끼만 먹었다. 그래도 눈으로 새로운 것을 담고, 새로운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니 눈과 머리로 들어오는 충만감이 위장까지도 채워준다. 물론 돌아오는 길 기차가 한없이 밀려버려 2시간 걸릴 거리를 4시간 가까이 소요해 돌아오는 길에는 완전히 넉다운이 되어버렸으나.. 마지막 날에 이런 알록달록한 색들을 눈으로 담은 것이 참 복 받은 한 달이었다, 하며 으레 감사해지는 것이다.


외국체류 시작 (2021. 9. 17. ~)으로부터 +621일.

브런치북 첫 연재일로부터 +53일.

주의사항: 언제 이 체류가 종료될지는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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