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피렌체 그리고 다시 독일
전날은 함께 했던 강아지가 떠난 후 4주기였다. 오늘로 그만 잘못 알고 있었다. 떠나보낸 날이 생생하다 여겼는데, 뭐가 그리 바빠 일 년의 딱 하루만 주어진 날을 추모 없이 흘려보냈을까. 그마저도 부모님이 보내주신 초롱이 나무 사진에 깨달으며 조금은 울적하게 시작한 이탈리아에서의 마지막 아침이었다.
씻고 비행기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빠진 것이 없는지 짐을 체크하며 챙겼다. 올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어쩌면 더 무겁게 느껴지는 짐인데 (여행의 고단함이 무게에 한 몫 했으리라) 어제의 감상과 일어난 직후 몰려온 울적함이 이어지기 때문인 것도 같다. 짐을 맡기고 다리를 건너 피렌체의 널찍한 광장을 지나 두오모 광장에 다다르니 압도적으로 크고 아름다운 성당과 종탑이 보인다. 아쉽게도 성당은 문을 닫았고 종탑에 약간 땀이 날 정도로 올라 겨우 마주한 전경은 창살로 군데군데 막혀 있어 기대했던 풍경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아쉬움으로 다음 여행의 행선지의 1순위로 피렌체를 두게 되는 설레임도 수반하게끔 한다.
며칠 더 머물다 10여일 후 독일에서 다시 재회하기로 한 친구와 작별하며 더 이상 우리에게 불운이 없는 여정으로 채워지길 기원한다(...고 했지만 곧바로 불운이 그녀에게 찾아오고야 말았으니,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고). 기차 시간이 애매할까 발걸음은 빠른데 스쳐가는 풍경은 그야말로 눈에 꾹꾹 담는다. 기차역으로 가는 버스는 난데 없이 길에 끼여든 말의 행진에 환장할 정도로 느려져 딜레이가 되지만, 덩달아 기차 역시도 그만큼 딜레이가 되어 이 곳의 매력이란 어쩌면 이런 알 수 없는 돌발성에 기인하는 걸까 어이없는 웃음을 떠날 때가 되어서야 지어보인다. 한니발 렉터 박사가 정신병동에서 탈출 후 은신처로 선택했던 곳이다. 숨어 지내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라고 그 찰나에도 생각했다. 덕분에 남는 시간으로 독일에 있는 친구에게 줄 초콜렛을 사고 점심 겸 저녁으로 먹을 일리커피와 샌드위치를 가지고 기차에 올라탔는데 뜨겁게 창가로 쏟아지는 이탈리아의 햇볕을 보고 있어도 마지막이라는 생각보다 왜인지 곧 또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다지 이별에 감흥없는 담백한 감상이 이어진다. 그나저나 어플로 표를 예약하니 웃긴 것이 2등석보다 1등석의 좌석이 더 싸기에 다시 밀라노로 향하는 기차는 본의 아니게 호사를 누렸다. 지진한 기차에서의 고난을 잊게 해주는 실로 푹신한 의자였다. 물론 떼쓰는 아이를 잠재우고자 객실 사방이 떠나가도록 크게 튼 유튜브 어린이 채널의 앙증맞은 언어가 귓전을 내내 때린 것도 어찌 보면 고난의 연속이었으나, 이 역시도 지나고 보니 다 우스갯소리로 꺼낼 만한 추억이다.
다시 돌아온 밀라노부터는 끝없이 이어지는 엉덩이 여행이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비행기로는 1시간 남짓의 거리인데, 여행지와 집까지의 순수 거리는 오늘의 이동시간만 해도 9시간을 달린 셈이다. 다시는 가격에 속아 프랑크푸르트한 공항을 이용하지 않으리 다짐한다.
이탈리아 로고가 적힌 물병을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 버리고 독일어가 적혀 있는 탄산수를 사니 hometown으로 모드가 전환된 느낌을 받는다. 야간의 레기오날반 2층은 대체로 조용하다. 일기를 쓰다가, 거의 끝이 보이는 <리틀 라이프>를 읽다가, 정리의 엄두가 나지 않는 사진을 괜히 뒤적이니 그래도 생각했던 루트대로 착착 아귀가 맞아 12시가 넘어가기 전 숙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느긋하게 짐을 꺼내어 정리하고 익숙한 것들로 몸의 정비도 마치니 금새 익숙한 것들에 둘러싸인다. 짧게 다녀와서였을까, 스웨덴에서 돌아왔을 때는 이 방이 참 낯설게 느껴졌는데 이번 여정의 끝은 그리 낯설진 않으니 (그래도 집에 돌아왔다는 감상이라기 보다는 이제 더 이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크기는 했다) 이 곳에 적응을 그때보다 더 한 것일까 자문해본다. 일기까지 마무리하고 책도 여행이 끝이 날 때 동시에 마지막 장을 보고 싶었는데, 여행 자체도 그랬고 책의 내용도 소화하기까지 나 스스로가 따라잡는 걸음이 필요해 결국 아무 것도 맺지 못하고 몸을 그저 누이는, 귀환의 밤이다.
느낀 그대로, 이탈리아는 정확한 이유는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또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이번 여정을 함께 했던 친구들과 만나고 헤어질 때 담백했던 그 순간처럼 말이다. 다음엔 또 어떤 사연들로 가득찰 지, 그 때의 내 곁엔 누가 있을지 혹은 나 혼자서 고독한 여행을 할지 알 수는 없으나 언젠가 만날 반가운 친구를 향해 잘 지냈냐는 안부인사 없이 자연스레 녹아들 훗날의 언젠가를 그리며, 여행기를 일단은 마쳐둔다. 혹시 모를 일이다. 언젠가 7이라는 숫자를 달고 연이어 여행기를 다시 시작하게 될지도.
외국체류 시작 (2021. 9. 17. ~)으로부터 +359일.
브런치북 첫 연재일로부터 +56일.
주의사항: 언제 이 체류가 종료될 지는 모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