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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몬트 Oct 11. 2024

낭만과 실존 사이

나는 여행자인가 유학생인가

일요일. 먼지만큼 작은 나라는 생명체가 독일의 넓은 땅에 비집고 들어온 지 3일째 되는 날이다.

어제에 이어 시차 적응에 실패해 새벽 네시에 깼다. 어제 오래 걸은 탓에 피곤한 나머지 일찍 자버려 하지 못한 짐 정리를 마저 한다. 한국에서 가져온 큰 캐리어 하나와 작은 캐리어 하나를 푸는데도 시간이 꽤 걸린다. 짐을 얼추 다 꺼낸 후 방 안의 가구들을 새벽이라 조심하며 새로이 배치했다. 운이 좋게도 이전 Untermieter*가 두고 간 것들로 책상, 침대, 전등, 의자 등 필요한 가구들은 얼추 있었고, '이런 것까지도 있단 말이야?' 하는 것들도 있어서, 크게 따로 사야 할 건 지금으로선 없어 보인다. 그래서 이전의 세입자들의 손을 스쳐갔을 이 물건들과 내가 가져온 짐들을 어떻게 조화롭게 배치할지가 관건이다. 창문 곁에 책상을 두어 책을 보고 작업을 하는 것이 나의 오랜 로망이었기 때문에, 먼저 책상을 창문과 바라보도록 두었다.



온전한 아침 해가 떠오르자 햇살을 여과 없이 받으며 타고 온 비행기에서, WG** 언니로부터, 전 세입자로부터 받은 것들을 합쳐 대충 요깃거리를 때웠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날씨가 좋다. 한국은 추석연휴가 시작되어 일을 가지 않으셔도 되는 부모님은 딸의 타국에서의 첫 주말이 궁금한 건지 연신 메시지를 보내신다. 채팅방의 스크롤을 조금만 올려도 떠나올 때 석별의 슬픔 같은 것이 진득하게 남아 있는데, 독일에 오자마자 정신없는 하루가 이어지다 보니 부모님이 생각나도 이제 슬픈 감정은 조금 무뎌진 것 같다. 앞으로 어떻게 생존해야 하나, 그러한 실존적 고민만 가득 차 있다.


청소는 가구를 대충 닦는 정도로 했다. 물론 전 세입자가 청소를 했던 터라 깔끔했지만 아마도 연식이 오래되어 보이는 카펫을 살짝 쓸어보니 올라오는 먼지가 많아서 이 일은 나중에 본격적으로 해야겠다 미루고는 어제 트램을 타러 가며 잠깐 스쳤던 동네의 구 중심가를 설렁설렁 걸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거리가 조용했고 상점도 거의 문이 닫혀 있다. 생동감 있지는 않지만, 한산한 길거리에 알록달록 나 있는 집들 너머로 맑은 하늘을 구경하는 것 또한 재미가 있다. 고층이 아닌 높아봤자 고작 3-4층 정도 높이의 색색의 건물들과 그 사이로 보이는 Weinberg***의 풍경은 여전히 비현실적이다. 내 걸음이 꼭 유학이 아닌 여행을 온 자의 것만 같다. 이렇게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다가 언젠가 금방이라도 돌아가버리는 그런 여행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 돌아갈지 기약이 없는 유학길에 와 있다. 그 사실이 전혀 실감이 되지 않는다. 처리해야 할 일들을, 그리고 내가 여기서 도전하고자 하는 일들을 하나씩 해나가다 보면 그때야 실감이 날까? 아직까지는 모를 일이다.


1시간 가까이 산책을 마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서는 한국에서 다칠세라 조심스럽게 가져온 사진들을 한쪽 벽에 붙였다. 어릴 때 사진, 부모님과 동생과 담긴 사진, 친구들의 사진, 무지개 나라로 떠난 반려견 초롱이의 사진을 침대와 화장대에서 가장 잘 보이는 벽면에 콜라주처럼 모았다. 이것을 하는 데만 시간이 금방 흐른다. 사진 속 시간들이 쌓여 지금까지도 여전히 무사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받듯이, 앞으로의 일상도 켜켜이 쌓여 이 사진들 중 하나로 남아 지금보다 시간이 더 흐른 뒤 지금을 어여쁘게 돌아볼 수 있기를 바라고 있으니, 벽면에 붙여진 사진들이 더 애틋해진다. 나의 개인으로서 역사 속 딱 중앙에 서서 왼쪽은 지난 과거와 오른쪽은 앞으로의 미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느낌이다. 저녁은 한정된 레퍼토리로 한정된 식재료로써 산출한 한정된 결과물, 즉 있는 식재료들 다 썰어서 볶은 음식과 인스턴트식품을 곁들여 먹었다. 첫 주말의 저녁은 이르게 찾아오고 잠자리에 들라는 피곤함도 금세 방문한다.


*, ** WG란 Wohngemeinschaft의 약자로서, 셰어하우스의 개념이다. 다만 집주인과의 계약은 주 세입자 한 명과 이루어지기 때문에, 집을 공유하는 이외 세입자는 Untermieter로서 주 세입자(Hauptmieter)와 계약을 맺으며 이것이 꼭 정식 계약서의 작성 등 형식을 갖출 필요는 없다. 실질적으로 집의 고장 등 문제, 월세 및 관리세 등으로 집주인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것은 주로 주 세입자가 맡으며, Untermieter는 주 세입자가 정한 규칙에 따라 생활한다.

** Weinberg는 와인을 뜻하는 Wein과 산을 뜻하는 Berg의 합성어로서 주로 와인을 재배하는 포도나무 농장이 일부 또는 다수의 면적을 차지하는 산지를 가리키며, 햇빛을 최대한 받기 위해 남서쪽으로 경사진 지형이 활용되기도 한다.


외국체류 시작 (2021. 9. 17. ~)으로부터 +2일.

브런치북 첫 연재일로부터 +46일.

주의사항: 언제 이 체류가 종료될 지는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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