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과 그 후의 지금을 생각하다
나의 영화 사랑은 주변 사람들이 쉽게 알고 있을 정도로 매일매일 집에서 혹은 직접 영화관을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다면, 독일에 와서 두 달이 채워지는 동안 본 영화는 다섯 손가락 안으로 꼽을 만큼 멀리 하고 있던 터였다. 그래도 독일의 영화관에 가는 것은 한 번쯤 (혹은 더) 시도해 보고픈 경험이라 생각이 들어 생각이 날 때마다 영화 스케줄을 홈페이지에서 찾아보곤 했었다. 내가 사는 도시에는 세 개의 Kino, 즉 영화관이 있는데* 내가 사는 동네와 가까운 Autofilmmer**, 상업 영화들을 주로 상영해 주는 프랜차이즈 영화관인 Cinemaxx, 그리고 시내 쪽에 있다가 Zellerau 구역으로 장소를 옮긴, 이른바 예술영화들을 주로 틀어주는 Central im Bürgerbräu가 그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개봉하여 한창 상영되고 있는 <Dune> 역시도 이 곳에서는 이르게 개봉을 해서 고민을 했었는데, 그 고민을 하던 찰나 OmdU***, 즉 오리지널 사운드에 독일어 자막이 달린 영화는 거의 막을 내렸고 독일어 더빙밖에 남지 않아 포기를 해야 했었다. 그 이후에도 관심 있는 영화들 역시 (이를테면 마찬가지로 티모시가 나오는 <The French Dispatch>도 오리지널판은 밤 7시에 상영하고 이런 식이다. 밤 9시만 되면 졸리는 현재의 나로서는 불가능한 타임테이블이다.) 대체로 더빙이 되어 있어서 씁쓸해하던 찰나, 독일 개봉일 기준으로 <Harry Potter und der Stein der Weisen>이 20주년을 맞이하여 4K 리마스터링 & 3D로 개봉을 한다는 소식을 발견했다.
사실 나의 세대들의 소년과 청년기는 해리포터가 어느 한 순간 이상은 꼭 들어가 있을 것인데, 나 역시도 크게 다르지 않고 더군다나 1편은 한 5번 이상은 봤었기에 상황이나 대사는 전반적으로 기억하고 있었기에 독일어 더빙판이었어도 선뜻 보러 갈 용기가 생겼음에 틀림없었다. 오리지널 사운드가 아닌 것은 굉장히 아쉽지만.. 독일 영화계는 더빙이 빠지지 않는 곳이니까 그러려니 넘겨야 한다. (영화 상영 전 개봉 예정 영화들 예고편을 틀어줄 때 그마저도 더빙을 하는 수고를 한다) 아무튼 해리포터의 원작소설과 영화 모두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던 (이전에 대구서 발레 학원을 다닐 때 친해졌던 미국서 온 친구도 들어만 봤다 했으니.. 세대가 다르면 안 봤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D도 기꺼이 동행을 하자 제안해 주었다.
나서기 전에는 비가 올 듯 말 듯 하다가 트램에서 내리니 점점 궂어지는 빗줄기를 이제는 우산 없이 맞고(우산이 귀찮은 독일인들이 이해가 되는 요즘이다) 15분 가량을 걸었나, 중앙역 뒤편으로 보이던 거대한 포도밭이 점점 가까워지는 순간 Cinemaxx라고 적힌 꽤나 큰 건물을 마주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이르게 도착을 해버려서 길 건너 주유소에 딸린 매점에 가서 커피를 테이크아웃하고 입구 바로 앞에 있던 직원에게 표를 구입을 했다. 그 사이 코로나가 심해져 규정이 강화되었는지 언제부터인가 예방접종증명서뿐만 아니라 신분증까지 함께 요구를 하던 (이름과 얼굴이 일치하는지를 보는 용도인 듯하다) 출입로를 지나고는 나같이 덕후들이 이 곳에도 많은 건지 꽤나 많은 사람들과 매점에서 산 스낵을 먹느라 마스크를 전혀 끼지 않은(...) 광경들을 보며 상영관 안으로 들어섰다. 독일도 어김없이 상영 전에 광고 영상을 볼 수 있었는데, 우리나라와 조금 다른 점은 영화와 관련 없는 상업 광고라기보다는 앞으로 개봉할 영화들을 예고편이긴 했다. 요즘 갑자기 필모그래피를 찾아보고 있는 Finn이 나오는 <Ghostbusters: Afterlife>, 그리고 Keanu Leeves가 나오길래 설마..? 했는데 그 설마가 맞았던 <The Matrix 4>, 감독과 출연진을 보면 당연히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던 <House of Gucci>까지, 갑자기 내 안의 영화 사랑 DNA를 끓어오르게 했던 재미나 보였던 (그렇지만 분명 독일어 더빙으로 나올 게 분명한^^) 예고편들이 지나니 드디어 해리포터가 시작되었다.
처음 1편이 개봉했던 당시 부모님과 영화관으로 갔던 순간이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영화를 볼 때의 세세한 감상은 구체적으로 생각은 나지 않지만, 해리가 거울 앞에서 부모님을 보고서는 그 이후로 계속 거울 앞을 떠나지 못하는 장면은 어린 날 주연 배우들과 또래 나이인 나에게도 그랬고 지금 역시도 애틋하게 다가왔었다. 그리고 묘하게도 마지막 장면에서는 울컥하기도 했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른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그때 영화관을 찾은 군중들이 낯설어 엄마 손을 잡으며, 책을 펼치면 그곳에 늘 있던 친구를 실제로 스크린으로 마주 할 생각에 두근거렸던 그 아이는, 20년이 지나 바로 독일에서, 심지어 독일어 더빙으로 된 이 영화를 다시 보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우리 부모님도 전혀 예상하지 못하셨을 터다. 삶이 어떻게 흐를지 누가 알겠는가. 어제 봤던 <Love Actually>도 배우들의 스토리보다 공항에서 실제 사람들을 찍은 장면이 더 영화처럼 뭉클하고 감동적이었는데, 오늘의 경험도 이와 비슷한 궤도에 있었다. 삶은 때때로 영화 같고, 영화는 생을 짧은 러닝타임으로 축약시킨 삶 같다. 이제는 어른이 되어버린 (아직은 되어야 하는.. 에 가깝지만) 나는 스크린 속 그 시간에 멈춰 있는 어린 해리에게 같은 나이일 때는 하지 못한 위로와 토닥임을 건네주고 싶었다. 앞으로 펼쳐질 고생길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말랑말랑해진 기분으로 어느새 밤빛이 자욱해 주황색 조명이 군데군데 멋지게 켜져 있는 거리를 걷는데 D와 나는 여전히 영화 속, 그러니까 호그와트 속 거리를 걷는 듯한 착각이 일었고 이 낭만적 허상을 떨쳐내고 싶지는 않아서 마침 배가 고프기도 했고 D가 영화를 보며 떠올랐다는 와인바로 걸음을 옮겼다. 테이블마다 비치된 양초의 불빛만으로 가게 내부를 밝히고 있던 내부 역시도 이 허상을 이어가기에 충분했고, 각각 화이트 와인을 한잔씩 시키고 나는 지난 Bamberg에서 먹었던 Schäufele를 재차 시켜서 D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화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밤이다. 해야 될 공부는 산더미지만, 마음은 충만하게 채워져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모자를 써도 안면에 부딪히던 보슬비가 더 이상 차게 느껴지지 않았다.
외국체류 시작 (2021. 9. 17. ~)으로부터 +57일.
브런치북 첫 연재일로부터 +77일 & 오류로 재업로드
주의사항: 언제 이 체류가 종료될 지는 모름.
* 영어 단어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독일어로도 있는 Theater와 헷갈리지 말자, Theater란 영화가 아닌 실제 배우들이 무대에서 연극을 하는 곳, 즉 연극 극장이다.
** 자동차 영화관.
*** Original mit deutschem Untertitel의 약자. 우리나라로 치면 한국어 자막이 제공되는 버전. 문맹률이 높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외국 영화인 경우 키즈 필름을 제외하고는 영화관에서 제공하는 옵션은 대부분 원어 음성에 한국어 자막이 달려 상영된다. 하지만 독일의 경우 성우 문화가 발달되어 있어 디즈니, 픽사와 같은 키즈 필름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외국 영화의 경우 별도의 안내가 없는 한 더빙판이라 보아야 하며, OmU 혹은 OmdU라고 표기되어 있는 경우 원어 음성에 독일어의 자막이 제공됨을 유의해야 한다. 독일 극장에서 유독 더빙판이 선호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나 몇 가지를 언급해 보자면, 우리나라와 달리 독일의 경우 영화관을 찾는 연령이 중장년층이 높아 이들을 배려하기 위함이라는 점, 자막은 화면의 전환에 따라 짧은 문장에도 메시지를 담아야 하는데 독일어의 언어적 특성상 문장을 짧게 줄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 등이 있다. 실제로 이러한 더빙 문화에 익숙해져 젊은 층이라도 자막을 상당히 거슬려하는 이들도 많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