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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읽는 인간

레나의 그녀에게

안녕, 레나 | 한지혜 지음

by 김담유

레나님, 답신이 너무 늦었지요? 당신의 편지를 처음 받은 것이 2002년이니까 햇수로 3년 만이네요. 그때 당신이 보내주신 편지는 「햇빛 밝은」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었죠. 자살하는 혹은 자살하고픈 ‘죽음’들에 관한 얘기를 담고 있었어요. 교미 중이던 사마귀 한 쌍이 차에 깔려 윗놈은 죽고 아랫놈은 반만 살아남았다가 안간힘을 다해 죽어가는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당신의 얘기는 끝이 났었지요. 그 이야기들의 끝엔 물론 너무나 눈부신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고요. 짐작하셨겠지만, 전 그 편지를 받고 난 이후로 당신을 짝사랑하게 되었어요. 그리워하게 된 것도 같고요. 그런 당신을 만난 건 좀더 훗날의 일이었죠.


2003년 어느 봄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한강변에서 열린 조촐한 포틀럭 파티였었죠. 전 당신이 세련됨으로 무장한 사람일까봐, 그래서 내가 결코 다가갈 수 없는 사람일까봐 자못 겁을 먹었더랬죠―이때 ‘겁’이란 ‘호기심’ 혹은 ‘호감’이란 말과 바꿔 써도 무방할 거예요. 당신은 시종 활기찼지만, 전 당신의 눈빛에 어려 있던 어떤 불만의 기미를 읽었어요. 기실 그때 제가 읽어낸 불만의 기미란 광기나 분열 혹은 어떤 종류의 ‘긴장’이었을 테죠. 그런 위험천만한 기운들을 밝은 햇빛 같은 눈빛 속에 잘 삭혀놓고 있던 당신, 얼굴 마주보고 앉아 진득한 수다를 떨어본 적도 없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차 한 잔 나눠 마신 적도 없지만, 전 당신을 알아보았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거짓말 같은 건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걸. 이 얘길 문학적으로 바꿔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은 修辭나 美文에 빠져 있는 작가가 아니라는 걸.


당신이 무수한 익명들을 향해 보낸 편지 가운데 한 통이 제게 배달됐던 날, 그날 가졌던 느낌을 당신을 만난 이후로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어 기뻤어요. 든든한 벗이 생긴 기분이랄까. 당신이라는 영혼이 동시대에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것이 위안이 돼준 날이 적지 않아요. 특히 그 짧았던 봄날의 파티 이후, 제가 憂鬱이라는 캄캄한 터널 속으로 발 딛게 된 후부터는 더욱 그랬죠. 돈 버는 재미도, 외줄 타는 사람처럼 詩 쓰는 맛도, 뻑적지근한 열대야 같은 연애에 갖는 가치도 죄 사라져버린 어느 날, 당신 같은 영혼이 이 캄캄한 터널 속에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제 더딘 걸음을 도와주었죠. 기실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타락한 386세대 같은 패러프레이즈에 전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다고 믿는 쪽이에요. 실상 요즘의 저는 그 ‘영혼’들을 만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어요. 그들만이 제가 이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돕는 유일한 키 같거든요. 신대철 시인은 이렇게 말했었죠. “우리가 우리의 땅을 벗어날 수 없고/ 흐린 강물이 될 수 없다면/ 우리가 만난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 아니고/ 디딤돌이다”라고.


당신이 왜 제게 디딤돌이 되어주고 있는지 『안녕, 레나』를 통째로, 다시 한번, 읽고 난 후에야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어요. 이제 그 얘길 해야 할 차례 같군요. 이 책을 당신에게 직접 받은 날은 당신과 두 번째로 만난 날이기도 했어요. 일 년하고도 세 계절이 지난 때였죠. 病 기운으로 퉁퉁 부어 있는 제 얼굴을 관심 있게 봐준 건 이번에도 당신이었어요. 당신이란 분, 참 섬세해요. 사람의 그늘을 살피는 건 당신의 특기 같아요. 당신을 설렁설렁 들여다본 사람은 당신의 그 섬세한 촉수를 미처 감지하지 못할 거예요. 당신은 씩씩하니까요. 당신은 한숨마저 씩씩하죠. 씩씩하다는 건 건강하다는 것과는 좀 달라요. 건강함이 일종의 운명적 상태라면 씩씩함은 그 운명을 대하는 일종의 태도일 거예요. 태도는, 문학인에게 태도는, 일종의 ‘행위’죠. 그건 선택의 문제이고 의지의 문제인 거예요. 다시 만난 당신은 좀 지쳐 보였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웠어요. 당신은 여전히 행동하는 문학인이었으니까요.


행동하는 문학인이라……, 이에 대해 하나의 정의를 내린다는 건 어불성설일 뿐만 아니라 徒勞에 가깝겠지만, 적어도 민족문학작가회의 같은 데 의무적으로 얼굴 내미는 것을 ‘행동’의 전부로 여기는 문학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부언해두고 싶어요. 제가 생각하는 행동이란 「사루비아」를 쓰기 위해 직접 사루비아 꽃씨를 뿌려 그 꽃과 더불어 사계절을, 나아가 일평생을 식물처럼 나는 것을 뜻해요. 넋을 놓고 식물처럼 눈만 굴려대는 환자 옆에서 식물처럼 함께 病을 앓는 것을 뜻해요. 病 안팎에서 절망하고 울고 지지고 볶는 존재들과 함께 먹고 자고, 나아가 그들 그리고 病의 정면을 들여다보는 것을 뜻해요. 그런 이에게 기록이란 그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 이루어지는 어떤 비약, 도약일 테고요. 당신의 「한 마을과 두 갈래 길을 지나는 방법에 대하여」는 이런 이야기꾼의 운명을 가진 이의 행위란 어떠한가, 혹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슬프도록 서슬 퍼런 문장으로 직조해놓았죠.


그래요, 당신은 상처로 단련된 사람이에요. 당신은 작가이기 이전에 행동하는 사람인 거예요. 전 당신이 읊어준 삶이 좋아요. 삶을 옮겨 적는 당신이 참 좋아요. 삶을 관조하는 당신의 메타 소설이 무척 소중해요. 놀라운 소설 「자전거 타는 여자」를 쓸 수 있게 한 당신의 병든 청춘과 꺾여 갇혀버린 세월과 당신 안팎의 비문학적 존재들에 감사해요. 일신상의 몇 가지 이유로 더디 씌어질 수밖에 없었던 제 편지를 이렇게나마 부쳐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바로 이 때문이에요. 당신에게, 그리고 당신의 존재들에게 진정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그리고 사족처럼 최근에 본 영화 얘길 덧붙이며 이 쑥스럽기 그지없는 편지를 갈무리해야겠네요.


쥬세페 토르나토레가 만든 〈피아니스트의 전설〉이라는 영화에는 무척 흥미로운 인물이 등장하지요. 이미지꾼, 이야기꾼의 운명을 놀랍도록 잘 환기한다는 점에서요. ‘데니 부드맨 T. D. 레몬 1900’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존재이면서 비존재인 매우 특이한 인물이에요. 당신의 ‘레나’처럼.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민하던 이들―곧 ‘새 시대’를 실어 나르던 ‘버지니아 호’에서 석탄공으로 일하던 데니 부드맨이라는 흑인이 어느 날 레몬 상자 안에서 한 사내아이를 발견해요. 아이의 그 길고 희한한 이름은 녀석을 최초로 발견한 데니 부드맨의 이름과, 녀석이 발견된 레몬 상자와, 녀석이 태어난 1900년 1월 1일의 의미가 합쳐져 붙여진 것이죠.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내보인 20세기, 즉 나인틴 헌드레드는 양부의 보살핌 속에 비밀리에 키워지지만 여섯 살 때 양부가 죽음으로써 다시 ‘비존재’가 되고 말아요. 하지만 그의 천부적인 피아노 연주 실력으로 인해 곧 그는 배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존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때로 악상과 악보를 무시한 연주에 사람들이 토를 달면 아이는 일갈해요. “악보 따윈 집어 치워!” 훗날 그 유일한 비존재를 유일하게 기억하는 동갑내기 맥스도 만나게 되고요. 그렇게 20세기는 순풍에 돛 단 듯 항해를 해가죠. 하지만 전쟁이 터지고 사람들은 흩어져요. 꿈과 미래를 싣고 대서양을 횡단하던 버지니아 호는 다이너마이트를 가득 실은, 곧 폭파시켜야만 하는 폐선이 되고 말고요.


황폐가 쓰나미처럼 휩쓸고 간 어느 날, 맥스가 폐선으로 찾아와요. 그는 알고 있거든요. 나인틴 헌드레드가 배 안에 여전히 있으리라는 사실을. 나인틴 헌드레드는 태어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뭍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으니까요. 홀연히 그 앞에 나타난 아름다운 여인을 찾아 나설 요량으로 맥스의 코트까지 빌려 입은 적도 있었지만 결국 그는 뭍 바로 앞에서 돌아섰었죠. 맥스는 폐선 안에서 나인틴 헌드레드가 남긴 유일한 레코드를 틀어놓고 여러 날을 기다려요. 마침내 그가 맥스 앞에 나타나요. 그리고 배에서 내리자고 호소하는 맥스에게 말합니다. 배에서 내려야겠다고 마음먹은 과거의 어느 날, 도시 앞에 마주한 그가 본 것은 여태 그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이었다고. 그건 바로 ‘끝이 없는 곳’이었다고. 도시엔 ‘끝’이란 게 없다고. 길은 아득할 정도로 수만 갈래로 펼쳐져 있고, 그 길 앞에서 인간은 ‘선택’을 종용당할 뿐이라고. 단 하나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경주마처럼 달려야 하는 삶 대신, 보이는 게 오로지 바다일 뿐이라서 자유롭고 다양하고 주체적인 환상과 망상을 허락하는 배 위의 삶을 선택하겠다고.


일평생 그가 꾼 환상과 망상은 곧 인간의 악보를 거부한 음악일 테지요. 배 위의 불안한 존재들은 그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고 술잔을 높이 들어 건배합니다. 그들이 선택한 길, 그리고 선택해야 하는 길의 입구에서 자신의 상처를 안으로 감출 수밖에 없는 비존재의 음악이 위로처럼, 그리고 축복처럼 쏟아지고요. 그 음악이야말로 인류가 꾼 20세기였을 테죠. 여전히 전쟁이 되풀이되고 있는 오늘날, 인간의 꿈이란 기실 그렇게 유령처럼 존재해야만 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오늘 우리를 우울하게 하지만요. 어떤가요……? 레나님이 탄 배, 그 배 안 어딘가에서 트럼펫을 불고 있는 ‘맥스’를 만나셨나요? 만나셨다면, 그에게 님의 음악을 다시 한번 서슴없이 들려주세요. 전 옆에 꼽사리 앉아 있다가, 당신이 피땀으로 달궈놓은 피아노 현에 담배를 갖다 댈래요. 담배는 불이 붙어 곧 연기를 뿜어낼 테죠. 그 연기, 우리 맛나게 나눠 마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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