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글 | 조르조 아감벤 지음
『불과 글』은 지젝, 바디우 등과 함께 ‘보편주의 회복’을 주장하며 이 시대 가장 주목받고 있는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최신간이다. 정치철학으로 유명해진 사상가인데 신학적 테마를, 철학적으로 사유하며, 문학적 글쓰기로 보여주는 재능이 정말 탁월하게 느껴져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지적 쾌감과 영적 충만이 함께하는 사유, 글쓰기. 아감벤이 왜 세계적인 사상가로 대접받는지를 알 것도 같았다.
『불과 글』은 소품 같은 에세이와 논문처럼 촘촘히 씌어진 아티클이 각자의 목소리를 내며 조화롭게 묶여 있는 독특한 책이다. 구성, 플롯의 강박이 없어 보여서 좋았다. 그런데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듯한 열 편의 글이 제목 ‘불과 글’로 모두 묶이고 관통된다. 아감벤이 말하는 ‘불’은 거칠게 요약하면 ‘신비’다. 현대인의 ‘글’에는 이 ‘불’이 빠져 있다는 것, 그래서 필연적으로 결핍된 서사만을 창조하는데 이 자체가 현대의 서사, 창조 행위의 조건이라는 것. ‘불’은 이 사생아 같은 조건 속에서 언듯언듯 기억되고 회상되며 되살아난다는 것. 이것이 바로 문학의 기원이라는 것. 이런 역설적 인식이 열 편의 글에서 두루 발견된다.
아감벤의 논지를 따라가고 있으려니, 시원을 알 수 없는 슬픔이랄까, 그런 것이 느껴졌는데, 어쩌면 시원, 근원을 탐구하는 모든 행위가 필연적으로 애도의 형식을 띨 수밖에 없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사후적으로 들기도 했다. 생각한다는 행위 자체가 ‘백색 페이지’를 떠올리는 것에 다름 아니며, 창조 행위의 어떤 국면에서는 ‘무위’야말로 가장 강력한 행위라는 반전된 의식은 신선한 깨달음을 주었다. 하나의 작품이 기술로 전락하느냐, 아니면 예술로 승화되느냐의 문제는 그 작품에 내장된 ‘잠재력’이 주관한다는 인식도 마찬가지.
『불과 글』에서 확인한 아감벤의 언어는 그야말로 직선적이고 이분법적인 구조를 멀찌감치 벗어나 있다. 중층적이고 입체적이며, 입과 꼬리가 연결된 뫼비우스의 띠처럼 맞물린다. 그가 말하는 ‘불’, 보편의 회복은 때로 환원주의로 오해받을 수도 있겠지만,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설명하는 실재계의 어떤 존재 방식을 보는 듯해 섬짓하기까지 했다. 이런 맥락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의미있게 읽혔던 부분은 다음의 구절이다. 나의 삶이 나의 언어(작품)와 보폭을 맞추고 있는지, 작품만을 또는 삶만을 편향되게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등,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이들이 한 번쯤 ‘온몸으로’ 곱씹어보면 좋겠다.
“어떤 잠재력을 관조하는 일은 전적으로 작품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관조를 통해 작품은 해체되고 무위적으로 변하면서 새로운 사용을 위한 또 하나의 가능성에 의탁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시적인 삶의 형태란 스스로의 작품 속에서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스스로의 잠재력을 관조하고 그 안에서 평화를 찾는 삶일 것이다. 살아 있는 인간은 결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정의될 수 없으며 오로지 작품의 무위적인 상태에 의해서만, 즉 어떤 작품을 통해 하나의 순수한 잠재력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스스로를 삶의 형태로(삶이나 작품이 아닌 행복이 중요한 것으로 부각되는 삶의 형태로) 구축하는 방식에 의해 정의될 수 있다. 삶의 형태란 한 작품을 위한 작업과 자기 연단을 위한 작업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지점에서 주어진다. 화가, 시인, 사상가는(일반적으로 예술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은) 어떤 창조 활동과 작품의 ‘저자’라는 이유로 주권을 지닌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오히려 이름 없이 살아가며 언어가, 시선이, 몸이 만들어내는 작품들을 매번 무위적인 것으로 만들고 이를 관조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경험을 시도하고 잠재력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다시 말해 자신의 삶을 삶의 형태로 구축하려고 시도하는 이들이다. 오로지 이 시점에서만 작품과 위대한 작품, 금속으로서의 금과 철학가들의 금이 여지없이 일치하게 될 것이다.” _「창작 활동으로서의 연금술 」, 218~2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