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그자가 입을 벌리면 | 김지혜 지음
누군가 다가와 길을 묻거든
그 사람의 눈은 보지 말아야 한다
눈을 보지 말고 소리를 들어야 한다
어디로 가겠다는 것인지
어디로 가야 한다는 것인지
눈을 바라보면 소리는 사라지고
가야 할 곳도 사라지고
옆에 다가선 사람은 죽어버린 정물이 된다
정물이 말을 하고 정물이 서 있는
어두운 전신주들의 거리
불 꺼진 맹인이 다가와 길을 묻거든
장의행렬처럼 늘어선 귀가 차량 사이로
맹인의 76번 버스가 좀체 보이지 않아도
타야 할 버스가 서너 차례 지나가도
가만히 서서 기다려주어야 한다
발을 쿵쿵 구른다거나 헛기침을 한다거나
살아 있음을 알리는 모든 곤혹스러운 소리는
삼켜야 한다 몸속의 정물이 소리를 내는 순간
맹인의 두 눈은 정확히 정물의 심장을 노리는
팽팽한 활시위가 된다 그러나
맹인이 겨누고 있는 소리를 볼 수 있다면
다가와 길 묻는 사람의 어두컴컴한
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땐 대답해주어도 좋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되물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