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한 죽음 |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편안함’이라는 말과 ‘죽음’이라는 말은 통상 함께 묶일 수 없는, 역설적 범주에 각각 기거하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보부아르는 자기 어머니의 죽음을 ‘편안한 죽음’이라 칭하며 회고하고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건이며 비록 그가 죽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부당한 폭력이다”라는 저자의 전언을 염두에 둘 때, ‘편안한 죽음’이라는 표현에는 결코 편안하지 않은 역설적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게 된다. 어머니가 무(無)의 존재로 되어가는 과정을, 이를테면 죽어가는 과정을 기록한 이 책은 놀랍게도 감정의 큰 동요 없이 조금은 건조하게 씌어졌다. 아버지의 죽음을 미리 경험한 후라서일까. 아니면 그야말로 커다란 상실의 슬픔을 겪은 뒤라서 그럴까. 팍팍하게만 느껴지던 저자의 문체가 이 책에서는 느슨하게까지 느껴진다.
한데, 저자가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은 뜻밖이다. “사람은 태어났기 때문에, 또는 다 살았기 때문에, 늙었기 때문에 죽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무엇인가’에 의해서 죽는다”고 말하는 저자는 죽음을 하나의 ‘폭력’으로 인식하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인식은 늘 그렇게 생각해온 것이기보다는 어머니의 죽음을 치러내면서 갖게 된 새로운 시각인 듯하다. 보부아르는 평범하지 않은 생을 선택함으로써, 즉 신앙을 버리거나 사르트르와 계약 결혼을 함으로써 그녀의 어머니와 일종의 ‘간격’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 간격은 어머니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차츰 좁혀지게 된다.
생사를 넘나드는 와중에 어머니는 보부아르에게 말한다. “내 상태가 이렇게 좋은 모습을 네가 봤다니 기분이 좋구나!” 모든 것이 유명무실해지는 죽음 앞에서 어머니와 딸은 비로소 화해하게 된다. 하지만 죽음(의 고통)은 죽어가는 이만의 고독한 순례일 뿐이다. 어머니의 고통은 어머니의 것일 뿐, 딸은 그 고통에 참여할 수 없다.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입장에서 파생되는 고통은 어머니의 고통과는 전적으로 무관하다. 아마도 그래서였겠지. 비로소 어머니를 온전히 바라보게 된 딸에게 그 순간 어머니의 죽음은 하나의 폭력으로 다가온 것일 터.
하지만 죽음은 하나의 폭력이라는 저자의 인식이 나는 좀 갑갑하게 느껴진다. 동양적 사유에서 죽음은 또 하나의 생이기도 하다. 또한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도 하다. 존재는 죽음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전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아마도 죽음이라는 일생일대의 사건이 아니었다면 저자는 그녀의 어머니와 본질적으로 화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화해의 필요성을 못 느꼈거나, 화해라는 것이 애초 불필요한 의식이었음을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다.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 생(生)보다 더 활기차다. 그것은 단 한 번의 현존을 통해 자신을 강력하게 각인시킨다. 타인이 최초로 내 안에 들어와 결코 빠져나가지 않는 순간은 바로 죽음의 순간이 아닐까. 우리는 죽음을 통해 타인의 민낯을 어쩌면 최초로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의 그것을 바라보게 되고, 바라보아야만 한다.
보부아르는 죽음의 순간을 홀로 건너갈 수밖에 없는 어머니의 침상에서 아마도 자신을 봤을 것이다. 육친의 죽음은 곧 자기 상실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폭력이지만, 육친과 나를 최초로 순결한 하나가 되게 한다는 점에서 축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녀)를 상실한 순간부터 그(녀)에게서 자유롭지 못하다. 매순간 그(녀)들은 망각의 깊고 깊은 강을 건너와, 부활한다. 그 강의 흐름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 그리하여 우린 또 태어나고 죽게 되리라는 것이, 이 인간계의 비극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