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담유 Apr 16. 2021

불평 없이 곤경을 견디는 자의 어떤 기록

아프지만 책을 읽었습니다 | 김은섭 지음 | 나무발전소

작년에 유방암 수술 후 항호르몬제 타목시펜 부작용으로 꽤 오래 어질병을 겪었을 때, 특히 두 가지를 할 수 없어 괴로웠었다. 사람과의 대화 그리고 독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두 가지를 할 수 없으니 유독 괴로움이 컸던 것 같은데, 코로나 시국에다 투병기가 겹치면서 사람과의 대화가 줄어드는 일은 오히려 다행한 일이었다. 20여 년 쉬지 않고 달려온 몸을 쉬다 보니 하루 종일 나 홀로 남겨져 말을 하지 않는 상태가 차라리 좋았다. 다만 타인의 말을 듣는 일조차 힘에 부쳐서 곤혹스러웠는데, 미팅이나 전화 통화는 물론이고 듣고 싶은 강의도 들을 수 없고 텔레비전 보는 일도 힘겨웠다. 그러다 보니 책에 더 손이 갔는데, 책 한 장 넘기는 일이 등산을 두세 시간 하는 일보다 더 힘들 줄은 정말이지 몰랐다. 한두 줄 읽다가 맥락을 놓쳐 다시 앞으로 돌아가고 다시 한두 줄 읽다가 맥락을 놓쳐 다시 앞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책 만들어 생계를 해결하는 사람이 책을 읽을 수 없다면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밥 먹는 일보다 책 읽는 일이 더 자연스러운 사람이 애를 쓰고 기를 써도 읽을 수 없다면 이제 무슨 낙으로 살지? 그때 알았다. 독서도 엄청난 에너지와 집중력이 필요한 일이란 걸. 건강하지 않으면 책도 읽을 수 없다는 걸. 


그런 와중에 한 권의 책을 3개월에 걸쳐 읽어냈다. 바로 김은섭 작가의 대장암 투병기 『아프지만 책을 읽었습니다』였다. 아파서 책을 읽을 수 없는 나는 아픈데도 책을 읽었다는 그이의 상태가 궁금했다. 대장암 3기면 수술에다 항암치료까지 6개월 이상을 암과 사투를 벌였을 텐데 아무리 도서 평론가라 해도 어떻게 이 많은 책을 읽고 이렇게 책 한 권을 뚝딱 써낼 수 있지? 놀라움도 잠시, 수많은 대목에서 수없이 고개를 끄덕이느라 독서 진도는 한없이 느려졌다. 암 판정을 받기 전과 후로 극명하게 나뉘는 세상의 채도에 대해서, 절제 수술 후 후유증으로 잠 못 드는 밤에 홀로 우는 마음에 대해서, 그러고도 남아 있는 항암과 방사선 등의 후속 치료와 그 비용과 시간의 무게에 대해서, 치료가 다 끝났는데도 3개월 또는 6개월의 시한부 인생을 반복해야만 하는 어떤 형벌에 대해서, 아픈 사람은 나인데 아프지 않은 이들을 더 염려하고 배려해야 하는 삶의 무게 앞에서, 나는 수없이 공감하고 동의하며 밑줄을 그었다. 그러다 느꼈다. 그는 결코 쓰러져서도 안 되고 쓰러질 수도 없는 가장으로서의 자신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그 힘이 그를 밤마다 책을 읽게 하고 글을 쓰게 한 원동력이었다는 사실을. 아니 스스로 책을 통해 삶의 수많은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법을 찾아내며 살아온 세월이 아픈 그를 일으켜 세웠다는 것을.


한 권의 책을 만 권의 깊이로 읽어내고 나니, 책을 읽을 수 없어 괴로웠던 나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말 그대로 눈 녹듯 스르르. 나는 한없이 부끄러웠고, 한없이 위로받았다. 아픔은 아픔만이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다는 듯. 지인이 위로랍시고 뱉은 “그나마 다행이야”라는 말이 결코 곱게 들리지 않았던 저자의 심사를 나는 이해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다행 운운은 당사자의 언어다, 타인이 함부로 휘저어서는 안 되는. 나도 암환자가 되기 전에는 이런 미묘한 결을 전혀 몰랐다. 그렇다고 이 책이 아픈 사람들만을 위한 책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환자라야 깊게 공감할 수 있는 아픔과 슬픔의 영역이 분명 존재하지만, 누구라도 비켜 갈 수 없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깊고 넓게 성찰하는 현자들의 언어가 한가득이다. 병이란 무엇인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우리가 병을 앓을 때 삶이 가면을 벗고 자신의 실체를 드러낸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은 이런 순간에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우주의 진리에 가 닿는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병은 하나의 망원경이자 출구다. 저쪽 세상을 바라보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잠시 망설였던 내가 생각난다. 나보다 더 아픈 이의 삶을 펼쳐 드는 일이 결단코 쉽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결에 나는 저자의 강한 생명력과 의지에 동화되어 “암투병도 나의 인생입니다”라는 말을 따라 읊조리고 있다. 그리고 그가 새롭게 알려준 ‘환자patient’의 의미를 아끼는 노트에 적어두고 매일 들여다본다. 


환자란 불평 없이 곤경을 견디는 자이다.

사람은 시련으로 죽지 않는 한 그 시련으로부터 더욱 단단해진다(니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