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도 아닌> 삶의 조각을 찾아가는 숨바꼭질

존재가 아닌 역할의 부재에 관하여

by Ellie

스포일러 있음


완성된 하나의 이야기를 잘라 순서를 뒤섞은 후 엮어낸 장강명 작가의 소설처럼, 영화는 그녀의 삶을 조각내어 마치 서로 다른 네 사람의 이야기를 보여주는듯 했다. 소녀 '카린'이 등장하고 나서야 예매할 때 읽은 로그라인이 생각났다.




비극은 폐차장에서의 숨바꼭질로부터 시작된 것처럼 그려진다. 술래가 된 키키는 민트색 그네 기둥에 기대어 손으로 눈을 가리고 꼬박 30까지 센 후 친구들을 찾아나섰다. 괴물같은 기계들이 커다란 고철 덩어리를 부수는 위험 천만한 폐차장에서 아이들은 여러번 그 놀이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던 친구들을 찾지 못했다. 결국 어른들도 술래가 되었다. 아이들을 같이 찾아다녔지만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아빠는 키키에게 친구들이 '죽었다'고 얘기해주었다. 아이스크림을 꺼내가던 저 냉장고 같은 곳에 친구들이 있었을까. 내가 찾아주지 못해서 죽은 게 아닐까. 꼬마는 '죽음'의 의미보다 '죄책감'을 더 깊이 배우며 자랐을 것이다.


소녀가 된 카린은 여전히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더이상 술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엔 카린이 숨을 차례였다. 폐차장만큼 위험한 세상 속으로 힘 없는 어린 소녀는 숨어들었다. 부모에게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계속해서 도망치며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부모가 이혼을 했는지, 둘 다 살아 있는지 자세히 설명되지 않지만 양녀를 구한다는 광고를 본 카린은 어쩌면 이 긴 숨바꼭질을 끝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린은 더 길고 위험한 숨바꼭질을 하게 되었다. 필사적으로 도망쳤고, 행복이 겨우 움트기 시작할 무렵 술래에게 또 잡히고 말았다.


카린은 갓난아기에게 젖도 제대로 물리지 못하고 떠나온다. 영화에서는 유독 노출 장면에서 가슴을 클로즈업하는데, 지나친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성적 매력을 어필하는 신체에서 아이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는 신체가 된 것을 의도적으로 보여준 것 같았다. 생명이 가득한 숲에서 햇볕을 받으며 가슴을 마사지하는 장면을 신성하고 신비롭게 연출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경험이 카린에게 모성애를 갖게 하여 아이를 위해 자수를 결심하게 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미 성인이지만 부모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고아'로서의 정체성은 아이를 낳음으로써, 즉 엄마가 되고 나서야 벗어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역시나 섣부른 해석이다. 엄마가 되어보지 못해 그 감정을 알 수 없다. 그러나 과감하게 추측해보자면) 부모의 역할을 해냄으로써 상처와 죄책감이 가득한 부모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그녀에게 생겼다. 곧 이름을 지어줄 아이는 자신이 엄마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으나, 그녀는 더 이상 숨지 않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아이를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 가둬두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부모들은 대체로 무책임하다. 위험한 곳에서 아이들을 놀게 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신경질적인 엄마와 폭력적인 아빠, 경마장에 데리고 다니며 범죄를 저지르는 엄마. 부모가 존재하지 않아 '고아' 카테고리로 묶어두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영화는 결국 (사회적으로 정의되는) 부모의 '역할'이 부재할 때 여성이 시기별로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를 키키, 카린, 산드라, 르네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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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딧이 모두 올라가고 처음 든 생각은 번역 제목이 '왜 <그 누구도 아닌>인가?' 였다. 프로그램북을 보니 너무 간략하게 설명이 되어 있어 gv 후기를 검색하여 읽어보았다. 한 인물이 겪게 되는 수많은 과거는 특정한 어떤 사람일수도 있고, '그 누구도 아닌' 사람일 수도 있다는 맥락인듯 하다. 나 또한 영화를 그렇게 읽었기 때문에 설명을 보고 나니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아닌 모두'라는 프로그램북의 문구는 '파란만장한 여성 개인사의 보편성'을 얘기하는 것처럼 읽혔다. 내 이해력이 부족한 것일 수도 있는데, 원제와 거리가 멀고 검색도 잘 걸리지 않아 좋은 제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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