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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남동 심리카페 Sep 07. 2022

흘려보낼 것은 흘려보내야

저는 제주에 있는 저의 집이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하울의 성과 비슷한 것 같아요. 그 이유 중 하나가 손잡이를 돌리는 것에 따라 각기 세상으로 연결시켜주는 하울의 성처럼, 저의 제주 집은 서울에서, 과거의 나에서, 그리고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게 해주는 세상들을 만나게 해 주니까요.


하울의 성과 연결되어 있는 네 개의 세상 중 하나가, 바람이 강하게 부는 긴장과 위험이 있는 세상이었는데 이번 주에 그런 세상을 경험하게 되었답니다. 바로 태풍 힌남노가 왔었던 주였으니까요.


제 집이 있는 곳에서는 밤 12시 ~ 1시가 되었을 때 정말 처음 접해보는 강풍이 불더군요. '지붕이 날라가는 건 아니겠지?'라는 불안한 마음을 갖고 강풍이 부는 비바람 속에 있었으니까요.



정말 모든 것을 날려버릴 것만 같았어요.



제가 제주도에서 상담을 해주는 카페 마음에 온 사장님도 다음날 인스타에 이렇게 글을 남겼을 정도니까요.


<마음에 온> 인스타 중에서


다음날 아침 동네에 나와보니깐 강한 태풍이 지나간 흔적들을 볼 수가 있었어요.


힌남노가 지나간 다음 날 아침



동네 산책을 하다가 인상적인 것이 눈에 들어왔었는데, 그건 돌담이었어요. 동네에 있는 돌담들이 그 강한 강풍에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있는 거예요. 끈으로 묶거나 지탱해줄 어떤 조치를 해준 것도 없는데 말이죠.




그냥 보기에는 치거나 기대면 무너질 거 같았는데 어제 그 강풍 속에서 무너지지 않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어요.


궁금하기도 해서 바람이 강했던 밤 12시 넘어서 우의를 입고 잠깐 집 밖에 나와 봤었는데 정말 바람이 너무 강해서 가만히 서 있기도, 걷기도 힘들 정도였었거든요. 그런 바람을 맞으면서도 저렇게 온전히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 정말 신기했어요.


그런데 그 신기함과 함께 한 가지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돌담들은 바람을 막아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어요. 바람을 흘려보내고 있었던 거였죠. 맞서고 따지고 버티고 있지 않고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흘려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어제도, 오늘도, 있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어젯밤, 밤새 그 강한 강풍들을 흘려보내며 있었을 돌담의 모습을 생각하니깐 이런저런 저의 상황과 이런저런 저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더군요.



과연 나는
흘려보낼 것을 흘려보내고 있나,



저 돌담도 힌남노와 같은 초강력 강풍을 흘려보낼만해서 흘려보냈던 것은 아니었을 거예요. 쉬워서 흘려보냈던 것도 아니고요. 그렇게 그냥 되어져서 흘려보냈던 것도 아닐 테고요. 그게 맞고 틀리고도, 옳고 그르고도, 정상적이고 비정상적이고도 아니고 그냥 그런 거 상관없이 흘려보낼 것은 흘려보냈던 것 같아요.


그런 모습을 굴욕적인 것, 초라한 것, 자존심 상하는 것이라는 해석의 틀로 보면, 그런 생각에 붙잡히고 갇혀 세상의 모든 어둠과 무거움을 다 끌어안고 가라앉게 되는 것 같아요. 비참하고 무기력해지고 망가져 의미 없어져 버린 무언가가 되는 거죠.



내 삶을 위해

흘려보내야 할 것은 흘려보내고,
흘려들을 것은 흘려듣고,
흘려버릴 것은 흘려버리는 건 어떨까요?



그러면 안 올 거 같고, 없을 거 같은 날을 만나게 되는 것 같아요. 맞고 틀리고, 옳고 그르고, 정상이고 비정상이고를 따지고 추구하기보다 내 삶을 위해 흘려보낼 것은 흘려보내고, 흘려들을 것은 흘려듣고, 흘려버릴 것은 흘려버리는 것이 어떨까요?


다른 누군가,
다른 무언가,
그럴싸한 어떤 무언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나를 위해서요.


힌남노가 지나간 다음 날 아침, 집 앞 바다와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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