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심오한 생각을 할 것 없이 먹고 자고 배설하는 인간의 기본 행위가 매일의 중요한 과제가 되므로 이 과제만 해결해도 충분히 즐거운 하루가 되는 것이다. 목표를 이룬다 해도 성취감을 잘 느끼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이 길은 작은 것에서도 큰 기쁨을 체험하는 좋은 훈련의 장소였다.
곽현 - <엄마, 나는 걸을게요>
나도 무언가 나에게 주어졌던 목표를 이루고 나면 그 성취감을 제대로 잘 느끼지 못했었다. 그 목표가 내가 원했던 것이었는지, 그렇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빠져 있는 일상을 살고 있었던 것인지 잘 몰랐었다. 그때는 그랬었다.
X로 인해 놀라고 다쳤던 마음은 며칠이 지나고 안정이 되었지만 뭔가 불안정하고 공허한 감정은 오히려 시간이 흘러가면 흘러갈수록 더 커져갔다. 뭔가 허탈하게 바람 빠진 풍선 같았다. 그때 신기한 메일이 받았다.
안녕하세요. 우연히 섬세한 성격의 사람과 관련된 글들을 보면서 저도 참 이러한데 하는 공감을 많이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옮기신 <섬세한 사람에게 해주는 상담실 안 이야기>도 잘 읽었습니다. 저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게 되고 인정하면서, 섬세한 성격의 사람의 장점을 더 크게 보게 된 계기였어요.
저는 심리쪽으로 누군가에게 동기부여를 해주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경험과 섬세한 성격과 관련된 연구들에 대해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좋겠습니다. 혹시 카페 형식으로 공간을 운영하고 계신 건가요? 계속 운영 중이시라면, 한 번 찾아가 뵈어도 될까요? 국내에서 섬세함에 뜻을 갖고 애쓰는 분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반가웠거든요. 혹시 만나볼 수 있다면 연락을 주세요^^
R 드림
신기했다. 내가 만든 책을 읽고 검색을 해서 나에게 이메일까지 보냈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나는 R의 메일을 읽고 바로 답장해주었다. 언제든 미리 시간 일정을 잡고 오시면 된다고. 그리고 궁금했다.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지. 지금 나에게 R과 같은 사람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지 못했던 반복되는 일상과 내 생활 반경에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과의 대화가 지금 나에게 필요할 것만 같았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에는 답이 없고, 내가 스스로 끌어올릴 기운은 없으니 말이다. 그렇게 나는 목요일 저녁시간으로 일정을 잡았다.
목요일 아침,
작가님, 저 내일 작가님 카페에 놀러가도 되요?
A에게서 문자가 왔다. R과 만나기로 일정이 잡혀 있지만 이른 저녁시간이면 괜찮을 것 같아서 이른 저녁시간이 괜찮은지를 물어보았다. A는 괜찮다고 했고, 친구랑 둘이 가겠다고 얘기해주었다.
A는 캐주얼한 스타일의 옷을 입고 내 카페에 왔다. 때와 장소에 맞춰 그에 매력있게 잘 맞추는 모습이 마치 매력있는 카멜레온 같이 느껴졌다. 함께 온 친구도 연예인처럼 예뻤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A의 친구는 실제 모델 겸 연예인이였다. A의 친구는 나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그런 것도 알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전 제가 요즘 많이들 말하는 소시오패스, 나르시시즘, 그런 것인지 궁금해요. 한 번씩 이 친구가 저에게 그렇다고 말하거든요.
옆에서 앉아있던 A가 피식하고 웃었다. 그러면서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재밌다는 듯 있는 A의 모습에 나도 재밌게 느껴졌다. 나는 A의 친구에게 그게 왜 궁금한지 물었다.
이 친구 말을 듣고 검색해봤거든요. 그런데 그런 모습이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더라고요. 제가 그런 것인지 어떤 것인지.
나는 A의 친구에게 그렇다는 것은 자신에게 어떤 의미, 어떤 느낌인지를 물었다.
제가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그런 사람이라면 걱정이 돼요. 이 친구에게 본의 아니게 결국은 안 좋은 사람이 될 것 같아서요. 그러면 미안하잖아요. 이 친구가 저와 보낸 시간들이요.
나는 A에게 친구가 어떨 때 소시오패스, 나르시시즘 같이 느껴졌었는지 물어보았다. 가능하면 상황을 함께 이야기해달라고 얘기했다. 그러자 A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장난이었는데요.
해맑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냥 장난으로 했던 말이었어요. 그런 애라고 생각했으면 전 안 만나요. 처음엔 제가 되었든, 얘가 되었든 변할 줄 알았거든요. 너무 같이 있는 게 재밌고 좋아서.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안 변하고 그대로 함께 있는 게 재밌고 좋더라고요. 그냥 그런 사람이었던 거였어요. 나에게 재밌고 좋은 사람.
이 사람들 보기 좋다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참 멋있어 보였다. A의 친구도 그림에 담겨 있는 모습이 불안정한 요소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그녀가 워낙 섬세해서 나오는 모습이었지 나쁘거나 고쳐야 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내가 그런 내용에 대해 A의 친구에게 이야기 해주자 그녀가 이야기했다.
이 친구를 만나기 전에는 정말 위태로울 정도로 불안정했어요. 이 친구랑 가족이 있어서 지금 많이 안정적으로 생활하고 있는 거 같아요.
타고난 민낯과 본바탕이라는 것은 그렇게 바뀌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공감과 교감은 단지 표현이 아니라 상대방이 느끼고 갖게 될 기분과 감정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반응하는지를 말한다. 표현은 학습이 되지만 공감과 교감과 같은 반응은 타고난다. 카페에 있다 보면 공감적이고 교감적인 표현은 엄청 하면서 챙겨주는 액션들은 보여주지만, 그 연출에도 틈이 있어서 의식하지 못하는 작은 부분들에서의 인위적인 부자연스러움을 보이는 경우들이 있다. 하지만 A의 친구는 그렇지 않아서 좋았다.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사람이 진짜 있을 수 있을까? 싶을 때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민낯과 본바탕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A는 사람을 많이 상대해서 그런지 잘하는 것 같았다. 나는 A의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해드리고 A에게 이 시간을 통해 알고 싶은 것이 있는지, 제가 좀 더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를 했으면 하는 것이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런 건 따로 없고요. 궁금했어요. 저번에 뵈었을 때 저에게 해주지 않았던 이야기들이요. 오늘 그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을까요?
그날은 자리가 자리이다 보니깐, 그리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프라이빗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어서요. 어떤 내용에 대한 것보다 많이 안쓰롭고 안타깝게 느껴졌었어요. 괜찮다면 어린 시절 어떻게 보내셨는지 이야기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제가 어렸을 때 이혼하셨어요. 그래서 초등학교때부터 아빠와 남동생, 할머니, 그리고 삼촌과 함께 살았어요. 지금은 괜찮은데 어렸을 때는 아버지와 할머니가 많이 무섭고 무뚝뚝했었어요. 그리고 5살 터울인 남동생을 더 좋아하셨어요. 할머니가 저를 보면 엄마가 떠올라서 그러셨는지 저에게는 차가우셨어요. 서운함도 많았지만 별수 없으니깐 그런 것에 익숙했졌던 것 같아요.
A는 자신의 이야기를 제 3자의 이야기를 해주듯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힘들고 불편해야 하는 이야기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모습이 내가 제일 안쓰럽고 안타깝게 느껴지는 부분이였다. A의 그림에도 그런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었다.
많이 속상하고 힘들었겠어요.
잘 모르겠어요. 힘들긴 했는데 뭐가 힘든 것인지 몰랐어요. 그건 지금도 그래요. 뭐랄까, 세상은 반 쯤 취해야 살기 좋은 거라는 것을 너무 일찍 깨달았던 것 같아요. 진짜 감정을 꺼내봤자 좋을 거 없고 괜히 더 힘들어지고 피곤해지니까요. 모든 관계는 제가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나는 어떤 말도 선뜻 나와지지 않았다. A가 보냈을 시간들을 생각해봤을 때 지금 살아내가고 있는 모습이 최선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저는 나름 잘 생활하고 있어요. 그리고 제 곁에 있는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러신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떤 말을 해드려야 할지 생각을 많이 하게 되네요. 전 A씨가 많이 울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정말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으실 것 같아요. 지금은 너무 좋은 모습이려고 쫓기시는 것 같아요. 그러지 않아도 사람을 많이 상대하고 관리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들었는데 A씨는 A씨 상태 그대로여도 되는 관계가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A 옆에 앉아 있는 친구를 보며 말을 했다.
그래서 전 A씨 옆에 친구분이 있어서 다행이다 싶고 고맙게 느껴져요. A씨 곁에 있어줘서요. 아무 이유도 아무 맥락도 없이 그냥 많이 안아줬으면 좋겠어요.
A 옆에 앉아 있던 친구가 내 말이 듣자마자 장난치듯 장난스럽지 않게 "오구구구"하며 안아주며 토닥여줬다. 난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답게 보이고 고마웠다.
너무 부럽네요. 굳이 너무 좋은 모습, 긍정적인 모습이 아닌 모습이여도 되는 사람들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좀 더 편안해지실 거예요. 모든 사람과 그럴 필요는 없고요. 지금 생활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생활하셔도 되세요. 그냥 그러지 않아도 되는 사람, 그런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주면 더 좋지 않을까 싶어요.
나는 친구를 보며 말을 했다.
아마 A씨는 힘들 때 이야기하고 기대라고 해도 그러지 못하실 거예요. 괜찮다고 해도 괜찮아 보이지 않으면 그냥 좀 더 물어봐주고, 맛있는 거 사주고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시간 만들어주고 그러면 좋을 거 같아요. 아무 일 없었더라도 그렇게 마음 써주는 모습에 고마워하지 않을까요? 전 그러실 거 같은데.
A는 웃으며 말했다.
작가님 돗자리 까셔야겠는데요.
우리가 수다와 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카페 문이 열리고 키가 큰 여자분이 들어오셨다. 나는 혹시 R씨인지를 물었더니 그렇다고, 좀 일찍 왔다고 대답을 해줬다. 나는 자리에 일어나 음료 메뉴판을 가리키면서 어떤 음료를 만들어드릴까요? 라고 물었다. R은 괜찮다며 창가 쪽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저쪽에서 책 보고 있을게요. 상담 마저 하세요. 저 정말 괜찮아요.
나는 R에게 그러면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이야기를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아 A와 A의 친구에게 혹시 좀 더 궁금하거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물어보고 싶은 것은 없는데 얘기해주고 싶은 것이 하나 있어요. 작가님.
네, 편하게 얘기해주셔도 되세요.
사람들에 대해 너무 깊게 생각하고 아무에게나 너무 잘해주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내가 무슨 말인지 생각하고 있는 중인지를 읽으셨는지 저번에 술집에서 사촌형과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고 얘기해주었다.
말이나 표정은 고맙다해도 진짜로는 고마워하지 않을 걸요. 그리고 귀 기울여 듣지도 않을 거예요. 굳이 마음을 다 해서 대해봤자 괜히 실망하고 마음만 힘들어져요. 듣고 싶은 말만 말해줘요.
옆에 있던 A의 친구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묻자 A는 이렇게 간단하고 깔끔하게 얘기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군더더기 없이 얘기해주었다. 내용을 들은 친구는 다 듣자마자 큰 목소리로 말을 했다.
뭐 그런 애가 다 있대.
A는 친구의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그냥 약한 사람이여서 그러는 거겠지. 몰라서 그러는 거가 아닐 거야.
A는 나를 보며 말했다.
약하다고 마음과 감정을 나눠줬다가는 괜히 힘들어지고 피곤해져요. 약해서 자기 밖에 없거든요. 엮이지 말아야 해요. 안 그러면 생활하기 힘들어져요. 그냥 약간 취한 듯 듣고 싶어하는 거 말해주며 사는 게 좋다니까요.
A는 웃으며 나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듯 고개를 끄덕여줬다. 나는 그런 A의 모습에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