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해서 뭘 못하는 사람?

by 연남동 심리카페

나는 A와 A의 친구를 보내고 R이 앉아 있는 자리로 갔다. 마시고 싶은 음료수가 있는지 물어보았을 때 괜찮다고 얘기를 해주었다. 나는 분수가 보이는 창가쪽 자리에 앉아 간단한 인사를 나누자 R이 카페 안을 가리키며 말을 헀다.


책을 보며 기다리는데 저도 선생님처럼 이렇게 저만의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언젠가 이것저것 할 수 있는 저만의 공간을 한 번 상상해보기도 하고요. 저도 조용한 공간에서 글 쓰고 요가하고 일대일 코칭하고 이러면 딱 좋겠어요. 이런 공간이 있는 선생님이 부럽네요.
그래요. 참 좋은 공간이죠. 여기가 좋은 생각을 해보게 만드는 거 보면서 또 생각해보게 되네요. 나중에 R님도 이런 공간 만들길 바랄게요.
이런 거 차릴려면 돈 많이 들죠?
글쎼요. 어떻게 하기 나름이겠죠. 전 인테리어 업자에게 안 맡기고 직접 다 제가 했거든요. 그래서 비용은 줄이고 고생은 많이 했죠.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렇게 예쁘게 되엇 만족해요. 그냥 공간 자체에 저를 담고 싶어서 부분별로 다른 스타일로 만들었어요. 이런 거 해본 적이 없는데 운 좋게 잘 나온 거 같아요.
정말요? 처음 해보신 거 치고 너무 예쁜데요.


나는 R은 내 카페와 카페 인테리어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섬세한 성격에 관하여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하셨는데 내가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해드리면 도움이 되실지를 물어보았다. R은 기획하고 있는 코칭 프로그램과 준비 중인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고, 어떻게 진행하면 좋을지를 물어보았다.


나는 나에 관한 이야기와 심리카페를 하면서 만나게 되었던 여러 섬세한 성격을 갖고 생활해가는 분들의 다양한 모습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가끔 섬세한 성격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접근을 할 때 보면, 너무 약하고 예민한 모습을 전제로 잡는 것을 많이 봤어요. 실제로 몇 년 전 코엑스에서 열렸던 국제 도서전에 참여를 해서 부스를 배정 받고 섬세한 성격에 관해 만든 책들을 펼쳐놓고 사람들을 만났었거든요.
와, 도서전에도 참가하셨었어요. 작가님은 뭔가를 참 많이 하시네요.


나는 웃으며 말을 했다.

외향적인 성격이나 적극적인 성격이 아닌데 사부작 사부작 무언가를 하는 것 같아요. 가끔은 저도 제가 해온 것들에 신기해 해요. 지나고 보면 저걸 어떻게 했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들도 있고요.
작가님에 대해 검색해보면서 신기하고 흥미롭기는 하더라고요.


나는 도서전 관련해서 R에게 얘기해주고 싶었던 것을 마저 이야기 해주려고 했다.


그런데 제가 제 부스에서 섬세한 성격에 관해 물어보는 분들이나 제가 만든 섬세한 성격에 관한 책을 사려는 분들에게 섬세한 성격에 관해 이야기를 드리고 있었을 때, 한 껄렁껄렁 해보이는 남자분 한 명이 제 부스 앞에 서서 이런저런 것들을 쓰윽 보더니 이러는 거예요.



아, 예민해서 뭘 못하는 사람들



섬세한 성격을 '예민한'이라고 부정적인 뉘앙스를 사용하는 것도 불편했지만, 그 불편함보다 더 컸던 것은 '뭘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불쾌함이었다. 내가 그 생각에 대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듯 행동할 생각은 없지만, 그냥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저런 말을 듣고 접하고 있는 섬세한 성격의 사람에게 그렇지는 않구나 라는 하나의 살아있는 사례가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전 그 말이 오랫동안 계속 맴돌더라고요. 섬세한 성격이라는 개념에서 말하는 것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선천적인 모습에 관한 것이거든요. 그래서 전 R님이 준비하려고 하는 프로그램이나 쓰려고 하는 책이 섬세한 성격을 약하고 상처 잘 받는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다루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마치 극복하고 고쳐야 하는 어떤 것이나 아니면 반대로 그래서 보호를 해야 하는 약한 것으로 보지 않기를 부탁드리고 싶네요.


R은 이런저런 생각들에 대해 나에게 물어보았다. 마치 MBSR 과정을 밟으면서 이것저것 묻던 나처럼. 나는 내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들을 해주며 섬세한 성격에 관한 여러 가지 나의 생각과 경험들에 대해 들려주었다.


선생님, 여러 가지로 많은 아이디어를 주셔서 감사했어요. 섬세한 성격에 관한 다양한 고민과 생각들을 들을 수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되었던 거 같아요.


나는 R에게 도움이 되어 다행이라고 미소를 지어주었다.


이건 이번에 제가 쓴 책이에요.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내서 나에게 주며 말을 이어갔다.


저는 브런치라는 곳에서 글을 써요. 작가님이 글을 연재하던 스토리 펀딩이랑 비슷한 건데 좀 더 작가로써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분들이 글을 쓰는 곳이라고 하면 될지 모르겠네요.


나는 도서전을 통해 알게 되었던 옆 부스의 사람들로부터 스토리 펀딩이라는 것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섬세한 성격에 관한 주제로 두 달이라는 시간 동안 매주 글을 올리면 펀딩을 진행했었는데 R이 거기에 올린 글들도 본 것 같았다.


매년 그 해에 브런치에 쓰여졌던 글들을 대상으로 상을 주고 책으로 출간도 시켜주는데 이번에 제가 썼던 글이 상을 받았어요. 그래서 이렇게 책으로도 나오게 되었어요. 작가님도 브런치에 글을 한 번 써보세요. 작가님이 하시려는 일에 도움이 되실 거예요.


책 표지에는 [화제의 카카오 브런치북 프로젝트 수상작!]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R의 모습이 새롭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중에 R이 가고 난 후 R의 책을 읽으면서 '우와 진짜 대단하다'라는 생각을 했다. 글을, 그리고 표현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잘 하고 있어서 감탄했었다.


작가님, 늦은 시간까지 내쫓지 않으시고 편하게 이것저것 이야기 나눌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드려요. 다음에 또 놀러오면 저도 아까 저쪽에 앉아 계셨던 분들에게 해줬던 것처럼 그림검사 바탕으로 상담해주세요. 저도 받아보고 싶더라고요. 오늘은 제가 다른 목적을 갖고 온 것인지라 참았지만, 다음에는 한번 꼭 받아보고 싶어요.


나는 웃으면 언제든 미리 연락을 해주시거나 예약을 해주시면 된다고 이야기를 드리고 인사를 하며 문까지 배웅해주었다. R은 카페 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멈춰서 나를 보며 말을 했다.


작가님, 사람들에게 너무 지치지 마시고 화이팅하세요. 제가 응원할게요. 그냥 응원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가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그럼 전 이제 진짜 갈게요. 잘 있으세요.


나를 응원한다는 말이, 그리고 응원을 한다는 것이 내가 존재감이 있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좋았다. 누군가의 응원을 받을 만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서 가슴 속이 따스해졌다.






움직이는 사람들은 움직임이 약해져가는 사람을 움직이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적어도 움직이고 싶은 마음을 갖게 만들어주는 따뜻함이 있는 것 같다. 반대로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다 같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기운이 있는 것 같다. 불안이 전염되듯, 움직이지 않음에 대해서도 전염이 되는 것 같다.


섬세한 성격의 사람들이 예민해서 뭘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섬세한 성격의 특징으로 인해 함께 있는 사람이 주는 기운에 영향을 깊고 강하게 받는 것일 뿐이다. 섬세한 성격의 사람이 뭘 못하게 만드는 사람과 있어서 뭘 못하게 되는, 움직이지 못하는, 판단하고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되어가는 것 같다. 상냥했던 P의 그림검사의 그림과 모습과 이야기를 접하며 더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




상냥했던 여자 P



언제나처럼 시작하기 전에 "어떤 것이 궁금해서 오셨나요? 제가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춰드리기를 원하시나요?"라고 P에게 물었다. P는 머뭇거리다가 말을 했다.

잘 모르겠어요.


어떤 것이 궁금해서 오신 것인지, 어떤 것을 알고 싶으신 것인지, 여기에 왜 왔는지에 대해 모르겠다고, 그냥이라고 이야기해주시는 분들이 있다. 진짜로 일행이 예약해서 그냥 오셨거나 진짜로 딱히 궁금한 것이 없어서 모르겠다고 말하는 경우들도 있고, 무언가 답답하고 힘든데 그게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을 물어봐야 하는지를 몰라서 모르겠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상냥했던 여자분이 바로 그런 분이셨다.


나는 그림검사 그림을 그리게 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P가 어머니와 자신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엄마는 감정 기복이 심하세요. 저보다 더 감정적으로 예민하신데, 불안정해질 때 풀 곳은 저밖에 없으세요. 언니는 이성적이고 냉정했거든요. 그냥 제가 엄마에게 맞춰줘야 모든 불안정한 것들이 빨리 끝났어요.


나는 맨 처음 엄마에게 맞춰줬던 것이 언제였었는지를 물어보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요. 기억이라는 것이 있었을 때부터이니깐 4살부터 아닐까요. 전 매번 엄마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어요.


언니와는 어떠했는지 물어보았다.

언니랑은 그래도 동등한 서열로 기싸움을 많이 했었어요. 한 살 차이였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힘들어하는 엄마에게 냉담하고 매정한 언니가 미워서 더 싸웠는지도 몰라요.


상냥했던 여자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을 꺼냈다.

어쩌면 언니가 미웠던 이유가 다른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날 힘들고 다치게 하는 엄마를 나 혼자 맡게 하고 자기는 이기적으로 자기 것 챙기는 언니에게 화가 났던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지금 언니 하고는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보았다.

언니랑 지금은 싸우지 않고 잘 지내고 있어요. 지금은 제가 언니 아래 서열로 들어갔거든요. 그래서 이제는 싸우지 않아요. 언니도 저에게 잘해주고요.



나는 P가 왜 자신이 무엇이 궁금해서 온 것이고 무엇이 알고 싶은지에 대해 모르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P와 같이 온 남자가 P와의 상담을 마치고 남자에 관한 내용을 다루기 전에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에 나에게 해줬던 말을 듣고 P가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다.


아직 사귀는 사이는 아닌데 이제 곧 사귈 사이니깐 좋게 긍정적인 얘기만 해주세요.


이 남자에게서 X의 느낌이 들었다.





X 같은 사람이 또 나타났다. X'



X'가 나에게 한 말은 내가 P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나누고 있을 때 하품을 하고 지루해 하는 모습과 함께 연결해서 생각해보게 되기 때문에 더 P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P에 대해 이해하거나 귀 기울이거나 그런 것은 없어보이는 모습은 X'가 그린 그림검사 그림들에서도, 자신에 관해 묻는 나의 질문들에 이야기하고 표현하는 것들에서도 너무 잘 담겨져 있었다.


X'에게 있어서 P는 먹잇감이었다. 너무도 매력있고 맛있게 느껴져 절대 놓치거나 빼앗기고 싶지 않은 먹잇감. 그 먹잇감의 기분, 감정, 심리, 마음, 시간, 사연 그런 것이 먹잇감을 대하는 존재에게 아무런 관심이 있지는 않으니 말이다. 먹잇감을 포착한 포식자가 '이 먹잇감을 안 놓칠 거야' 라는 모습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저 모습과 냄새를 못 느끼기가 어려울 텐데라는 생각과 함께 P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마치 불쌍하고 불행하게 살고 있는 방에서 문을 열고 나와 다시 똑같이 불쌍하고 불행하게 살게 될 방으로 들어가게 될 것만 같아서 너무 짠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이 지어졌다. 여자 앞에서 그럴싸하게 친절한 사람, 좋은 사람, 착한 사람, 공감적인 사람의 모습을 연극 무대 위에서 연기하듯 시연하는 모습이 뻔뻔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X'의 모습을 분별하지 못하고 '그런가보다. 그럴 수 있는 것이겠지' 하며 좋게 좋게 그냥 X'가 보이고 이끌어가는 대로 가만히 있는 P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지었다.




그동안 내가 만난 X들의 공통점들이 있다.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움, 공감과 교감이 낮은 모습이 아닌, 뻔뻔함이다. 속이고 거짓말하는 것에 아무런 불편감을 느끼지 않는다. 말이 되었든, 표정이 되었든, 반응이 되었든 머뭇거림이 없이 속이고 거짓말을 한다, 그들에게 솔직함, 진정성 그런 것은 없다. 좋은 사람, 착한 사람, 따뜻한 사람의 모습을 복사해서 갖다 붙인 클리셰 범벅이 그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먹잇감이 되는 것이 그런 그들의 모습에 관대하고 긍정적으로 넘기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연출하고 보이는 모습을 그대로 받는다. 때론 서로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뭘 하고 있는 것인지 난 모르겠다. 그냥 안타깝고 안쓰러운 사람들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연과 이유가 있겠지만 불쌍하다. 나는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무엇을 말해주어야 하나.'


'이러는 것이 내가 원했던 것이였나'






20151011_114024.jpg 서울 국제 도서전 참여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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