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심리카페에서 새로 준비하고 있는 독서모임을 만들어가는 30일간의 기록과 생각을 담고 있고, 이 글이 여섯 번째의 글이랍니다.)
위로가 필요한 외로운 '천사 판타지 여자'가 있습니다.
분별보다는 위로가 필요했고, 자신이 나쁜 사람, 악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사실 외로웠기 때문입니다.
풍요 속 빈곤. 이것이 그녀의 삶이었습니다.
사실 그녀는 자기 자신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를 때 자신이 되려고 했던 모습입니다.
나쁜 사람, 악한 사람보다는 뭐라도 좋은 것이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나쁜 사람, 악한 사람의 모습으로 있는 것 자체가 힘들고 불편한 것일까요? 이러한 이유들이 아니라면 그녀에게 관계란, 사람이란 그녀로 하여금 어쩔 수 없게 만드는 것일까요?
어떤 사연과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 보다 안쓰럽고 속상하고 불쌍한 것은 그렇게 위로가 필요한 외로운 '천사 판타지 여자'는 자기다움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찾으려고 하고 있고, 찾고 있다고 하지만, 진짜 찾으려고 하는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를 때는 착한 사람, 좋은 사람!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기, 그녀의 삶에서 그녀가 해왔던 것입니다.
상대가 원하는 것 맞춰주기. 그와의 관계에서 그녀가 해오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를 잃기 싫어서
그녀는 상대가 안 하면 자신이 떠안습니다.
그녀는 사실 상대보다 관계에서 버림받고 잃게 되어 다시 혼자가 되는 것이 겁나고 괴로울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보고 느낀 상대의 민낯과 본바탕은 별것 아니고, 내가 잘못 본 것으로 만듭니다. 자신이 본 것이 상대의 민낯과 본바탕이면 안 되니까요. 그건 일어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이고 싶은 그녀는 상대가 미숙하고 서툰 것으로 놓고 자신이 불쌍한 상대를 구제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존재감 없이 살아온 외로운 그녀는 상대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된 느낌이 너무 좋습니다.
위로가 필요한 외로운 '천사 판타지 여자'는 자신의 그 존재감에 숨을 쉴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그 존재감의 대가로 숨이 막혀 답답해 죽겠습니다.
그녀는 사실 다 알고 있습니다. 상대의 민낯, 본바탕을. 문제는 상대의 민낯과 본바탕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이죠.
힘들고 시간이 걸리겠지만, 노력하면 고칠 수 있을 거야.
내가 잘하면 돼. 내가 예민하게 굴지 않고 의심하지 하지 않으면 돼.
오늘 상담해 드렸던 분 중에 위로가 필요한 외로운 '천사 판타지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변화를 원한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변화를 원하고, 어느 정도로 지금 심각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었을 때 1에서 10 중 9라고 말을 합니다. 여러 신체 증상으로 인해 힘들다는 말도 함께 했었죠.
그런데 그분은 여전히 상대와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를 묻습니다. 상담은 상대와 그분에 관한 내용은 알려드릴 수 있지만, 변화를 이끌어주는 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매번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독서모임이라는 형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상담을 마치고 카페 나오는 길에 <좋게 좋게 생각하다 자리를 잃어버리는 이유>라는 글에 새로 달린 댓글을 보면서도 여러 생각과 감정을 갖게 되더군요. 사람의 기분과 감정을 폐허로 만드는 사람들로부터 보호와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좋게 좋게 생각하며 삶을 지탱하다 보면 아예 다 포기하게 된다는 단락이 마음에 꽂히는 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