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숲길에 있는 비밀장소, 연남동 심리카페의 도인종입니다. 저는 이곳에 길을 잃거나 놓친 분들이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갑자기 잃게 되거나 갑자기 헤어짐을 통보받게 되었을 때, 우리는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사려 깊은 위로를 해줄 수 있는지,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 님의 ‘사람 공부’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을 각색해서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나의 감정과 의도만 앞선 위로가 아닌, 사려 깊은 위로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트라우마 치유에는 골든 타임이 있습니다. 보통 이론적으로 3개월이라고 하죠. 그래서 전문가들은 그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고, 위험해진다고들 합니다.
치유에는 분명 골든타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정말로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어요. 지금 내 상황을 빨리 받아들이고, 힘든 것을 얘기하기 시작하고, 상담하게 만드는 것, 이것은 골든타임 때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물리적인 상황이 바뀌었다고 해서 거기에 맞게 사람 마음도 금방 리셋되지 않아요.
트라우마 피해자는 정신과 환자가 아닙니다. 트라우마는 갑작스러운 어떤 충격적인 일로 인해서 삶 전체가 틀어지고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내가 유지해 오던 심적, 물적 균형이 무너진 상태에 처한 사람인 것이죠. 트라우마 피해자는 자기 상처와 같은 심리내적인 요인으로 인해 생긴 정신과적 질병을 가진 환자와는 다릅니다.
당장은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더라도 어떻게든 상담을 받고 어려움을 털어놓고 도움을 받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지가 않아요.
마음을 여는 행위는 당위적인 이유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여준다고 느껴지는 사람에게만 마음을 열 수 있어요. 설득으로 해서 되는 일이 아니지요.
갑자기 내 삶이 진흙탕 속으로 처박혀 다 무너져버렸는데, 정신과 환자가 되어서 나조차도 망가져버린 느낌을 가져야 하는 것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나요?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외부 일에 의한 트라우마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이 무너졌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지만 나는 정신과 환자가 아니다. 단지 힘든 상태에 처한 것일 뿐이다,라고 느껴야 무너져 내린 세상을 자신의 어깨로 떠받치고 일어날 최소한의 힘을 확보할 수 있어요. 자신에게 남아 있는 힘을 확인할 수 없으면 트라우마 치유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갑자기 환자 취급하는 사람에게 저항하는 모습은 건강한 자아가 작동하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트라우마 피해자를 정신관 환자로 취급하는 모든 행위는 피해자 개인이 지니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위엄과 건강한 자아의 힘에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치유과정 중에 발휘해야 하는 자기 상황에 대한 자기 통제력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러는 것은 명확히 반치유적인 시각입니다. 성찰이 없으면 쉽게 이렇게 합니다. 상처를 치유해 주겠다고 시작한 일이 거꾸로 상대에게 결정적인 상처를 주는 것이죠.
저자는 이러한 예에 대해 10년 전 일을 이야기해 줍니다.
세월호 참사 초기에 수십 개의 심리상담 부스를 차려졌습니다. 그런데 정작 피해자들은 그곳을 이용하지 않았어요. 지자체에서는 피해자들이 아이를 찾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장례식이 치러지는 장례식장 앞에 상담 부스들을 차리기 시작했죠.
그런데 장례식이 끝나도 유가족들은 상담을 받으러 오지 않았어요. 그러자 심리상담 팀을 꾸려서 유가족들을 일일이 방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백 가지 문항으로 된 심리검사지를 나눠주면서 심리상태를 체크해봐야 한다, 상담을 받으러 와야 한다며 유가족들에게 심리치료를 독려했죠.
이런 식으로 했던 이유는, 트라우마 치유의 교과서적인 방식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다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이에요. 그런데 그런 지식들이 현장에서는 하나도 통하지 않았던 것이죠.
여기서 잠깐 멈추고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지만, 이것이 과연 크나큰 상실을 겪은 사람에게 맞는 이야기였을까요? 장례식장에 세워진 심리상담소가 꼭 필요한 것이었을까요? 유가족들이 그곳에서 심리상담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상식적으로만 생각해 봐도 상담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크나큰 상실감에 빠져 있는데 어떻게 상담이 가능하겠어요?
내 고통을 누군가에게 토해내는 일인 상담이란, 기본적으로 몸과 마음의 이완과 함께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유가족들에게는 상담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죠. 아이를 찾을 때까지는 자신에게 최소한의 이완도 허용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상황입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나 편하자고 상담을 받는다는 것이 말이 안 되죠. 상담해야 한다고 아무리 설득해도 그때는 안 합니다. 아니, 못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례식장에 있던 수많은 심리상담 부스들은 별 의미가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참사 초기부터 자꾸 상담, 상담한 것이 오히려 유가족들을 자극하고 화를 내게 하는 꼴이 된 것입니다. ‘저 사람들이 자기 일 아니라고 저러지.’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상담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과정, 자기 고통에 집중하는 과정이에요. 우리는 트라우마 피해자들은 나 때문이라는 감정과 생각에 늪처럼 빠져들게 되기 쉽습니다. 그런 감정이 너무 크면 사람은 ‘자기 처벌’을 합니다. 자기 몸을 함부로 다루는 거죠. 자기를 보호하지 않고, 그럴 자격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상담도 하기 어렵고 몸이 아파도 병원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심리적으로 잘 다루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상담이 진행되지 않습니다.
그 점을 간과한 채로 이루어졌던 모든 노력과 접근과 대책은 모두 와닿지 않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해주는 위로는 어떤가요? 상대의 기분과 감정을 이해하고 심리상태를 고려하는 것 없이 당신의 방식, 원론적인 이야기로 결국 솔루션 중심적인 위로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자신의 상태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하는 위로의 말을 들으면 화가 나기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뭐뭐 해야 한다는 말은 트라우마와 같이 큰 충격과 상실을 겪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사려 깊은 도움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