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길을 걸으면서 큰 병을 얻었다. ‘걷기 중독증’이라는 희귀병이다. 아직 의학적으로 규명되지는 않았지만 심각한 병임이 분명하다. 내가 어떻게 이 병에 걸렸는지 기록을 남긴다.
처음에 아내가 같이 걷자고 했을 때 별로 내키지 않았다. 무시했다는 게 더 솔직한 표현이다. 지리산을 30여 차례 종주를 했던 나에게 '둘레길'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시시했기 때문일 거다.
이를 악물고 땀을 흘리며 거친 산을 올라가 정상에서 보는 그 장엄한 풍광과 비교해서 겨우 동네 마실길 돌아다니는 게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큰 병을 치른 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걷기 운동을 시작한 아내의 간곡하고 집요한(^^) 권유에 어쩔 수 없이 2019년 여름 어느 날 둘레길에 입문했다.
첫 시작은 북한산 둘레길. 물론 그전에 제주도 여행을 하면서 제주 올레길을 걸어봤고 유명하다는 몇몇 둘레길도 가 본 적이 있지만 전체 코스 완주를 목표로 둘레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이왕 걷자면 몇 가지 원칙을 정해서 걷기로 했다. 둘레길은 몇 개 코스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꾸준히 걸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원칙을 정했던 것 같다.
매주 일요일에는 무조건 걷자. 피치 못할 다른 일정과 겹치지 않는다면 반드시 걷자, 눈이 오거나 비가 오거나 날씨 핑계 대지 말고 꾸준히 걷자.
북한산 둘레길부터 시작하여 우리는 매주 일요일 고양 둘레길, 경기옛길(의주길), 양주누리길, 남산둘레길, 서울둘레길 등 접근이 편한 둘레길을 걸었다.
처음에는 생각보다 힘이 부쳤다. 동네 마실길이라고 만만하게 본 게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 깨닫게 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루에 대여섯 시간을 십여 km, 이십여 km 씩 걷는 게 내 체력으로는 쉽지 않았다.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기도 하고 무릎이 아파서 고생하기도 했다.
게다가 일주일에 하루 밖에 쉬지 못하는 내 밥벌이 상황에서 그 일요일마저 집에서 쉬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도 고역이었다.
다행히 몇 차례 위기를 넘기다 보니 걷기에 점점 재미가 붙었다. 처음에는 한 시간 정도 걸으면 무조건 쉬어야 했지만 어느덧 10km 정도는 쉬지 않고 한 번에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지구력과 근력이 좋아졌다.
2020년부터 코로나가 확산되자 사람이 별로 없는 둘레길은 우리에게 최상의 놀이터가 되었다. 2021년 겨울 북한산 둘레길을 두 번째로 완주한 후 다른 놀이터를 찾다가 경기둘레길을 발견했다.
그리고 2022년 3월 경기둘레길 1코스를 처음으로 밟아 본 후 올해 2024년 5월 19일 마침내 60개 코스를 완주했다. 햇수로는 3년째, 횟수로는 51번째에 경기도를 한 바퀴 돈 것이다.
총 누적거리는 973.55km. 경기둘레길 공식 거리는 860km라고 하는데 우리는 100km나 더 걸은 셈이다.
둘레길의 대중교통이 불편하다 보니 시작점에 주차를 하고 도착점에서 왕복하거나 한 코스를 두 번에 나눠서 걷는 경우가 많아서 거리가 100km 이상 더 늘어났다.
모든 둘레길은 항상 옳지만 경기둘레길은 우리가 걸었던 다른 둘레길과 비교해서 훨씬 광활하고 거대하다. 큰 형님 느낌이 물씬하다.
2022년 봄부터 올해 봄까지 계절이 아홉 번이나 바뀌는 동안 걷다 보니 재미있거나 힘들었던 추억이 많다.
2022년 여름 폭우 때문에 무너지고 막혀서 건너뛰었던 길을 올해 봄에 다시 걸으며 계절에 따라 색다르게 아름다워지는 길에 감탄을 했다. 도시생활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계절의 변화를 일주일에 한 번씩 걷다 보면 성큼성큼 느끼게 된다.
20km가 넘는 길을 한 번도 쉬지 않고 묵묵히 로봇처럼 걷기도 했고, 엉뚱하게 잘못 걸려있는 리본을 너무도 자신만만하게 따라가다가 길을 잃고 한참을 헤매기도 했고, 택시 잡기가 어려워 시골 도로를 무턱대고 걷던 우리를 우연히 지나가던 차가 친절하게도 태워준 일도 있다.
한 여름 대낮에 줄줄 흐르던 땀이 소금 알갱이로 변하는 걸 느끼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땡볕 도로 길을 몇 시간 동안 수행하듯이 묵묵히 걷던 일도 있었고. 반대로 비가 갠 후 숨 막히게 화창한 하늘 아래 눈물 나게 아름다운 길을 서로 할 말을 잃고 몇 시간 동안 몽롱하게 꿈꾸듯이 걷던 추억도 있다.
산속 허름한 빈집 처마에서 도시락을 먹다가 말벌에 쏘여서 휴양림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시골 보건소에서 도움을 받은 일, 예상치 못한 폭우에 나무가 쓰러져 길이 막히고 계곡으로 변해버린 임도를 겨우겨우 헤치고 나온 일. 해가 지고 어두워진 숲길을 핸드폰 플래시에 의존해서 걷다가 멧돼지를 본 일도 지금 생각하면 잊지 못할 추억이다.
힘들게 올라간 산사에서 일요일 국수 공양으로 맛있게 점심을 얻어먹기도 했고,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2시간에 한 대씩 오는 버스를 기다리며 뒤늦은 점심으로 싸 온 컵라면을 허겁지겁 먹기도 했다.
비수기라서 운영하지 않는데 주인이 실수로 문을 잠그지 않았던 펜션의 편의점을 무인가게인 줄 알고 들어갔다가 주인과 통화해서 컵라면 하나씩 사 먹고 문을 잠가주고 나온 에피소드도 떠오른다.
걸었던 많은 길과 그 길에서 만들어진 추억이 생생하다. 사진을 많이 찍지 못해서 아쉽지만 영상으로 남겨서 그나마 다행이다.
혹시 경기둘레길 정보를 원하신다면 아래 동영상을 주의 깊게 보시라. 경험에 의하면 처음 가는 둘레길 코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미리 알고 가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걸었던 경기둘레길 전체 과정을 요약하면서 코스별로 원픽 사진을 남겨본다.
코스 / 날짜 / 시작~끝 / km
1 / 22.3.20 / 대명항~문수산성 / 14.8
2,3 / 22.3.27 / 전류리포구~문수산성 / 26.9
4 / 22.4.3 / 전류리포구~대화역 / 16.9
5 / 22.4.17 / 대화역~성동사거리 / 22.7
6 / 22.4.24 / 성동사거리~반구정 / 20.4
7 / 22.5.1 / 율곡습지공원~반구정 / 15
8 / 22.5.15 / 율곡습지공원~장남교 / 18.7
9 / 22.5.22 / 장남교~숭의전지 / 17.4
10 / 22.5.29 / 군남홍수조절지~숭의전지 / 20.6
11 / 22.6.1 / 군남홍수조절지~신탄리역 / 26
12 / 22.6.5 / 신탄리역~내산리 / 15.9
13 / 22.6.12 / 중3리 ~내산리(왕복) / 21.85
14 / 22.6.19 / 중3리 ~운천터미널(왕복) / 20.4
15,16 / 22.7.3 / 일동온천단지~운천터미널 / 21.24
17 / 22.7.10 / 일동온천단지~강씨봉(왕복) / 20.4
18 / 22.7.17 / 보아귀골~논남유원지 / 18.4
19 / 24.4.28 / 보아귀골~용추계곡 / 15.48
20 /24.5.6 / 가평역~용추계곡(왕복) / 18.43
21,22 / 22.8.1 / 가평역~청평역 / 22.2
23 / 24.4.21 / 청평역~삼회1리(왕복) / 17
24 / 22.8.2 / 설악터미널~삼회1리 / 20.4
25 / 22.8.4 / 설곡리~비솔고개(왕복) / 25.3
26,27 / 22.8.6 / 비솔고개~용두리 / 18.22
28,29 / 24.3.31 / 갈운1리~계정1리 / 20.7
30,31 / 24.4.10 / 계정1리~장수폭포 / 21.76
32 / 22.8.21 / 강천면~장수폭포(왕복) / 17
33,34 / 22.9.8 / 한강문화원~강천면 / 17
35,36 / 22.10.2 / 현수1리~한강문화원 / 22.5
37 / 22.11.13 / 장호원~현수1리(왕복) / 24.3
38 / 22.11.20 / 일죽터미널~장호원 / 24.2
39 / 22.11.27 / 광천마을~칠장사 / 21.34
40 / 23.3.26 / 칠장사~덕성산(왕복) / 9.71
40 / 23.4.9 / 금광호수~덕성산(왕복) / 15.19
41 / 23.4.16 / 청룡사~석남사(왕복) / 11.73
42 / 23.5.14 / 청룡사~서운산 / 13.82
43 / 23.11.5 / 서운면~평택역 / 22.4
44 / 23.11.12 / 평택역~신대2리 / 23.7
45 / 23.11.26 / 신대2리~평택항 / 23.7
46 / 24.1.7 / 평택항~이화리 / 15.85
47 / 24.1.14 / 이화리~궁평항 / 18.3
48 / 24.1.21 / 궁평항~탄도항 / 19.5
49 / 23.5.7 / 대남초~탄도항 / 20.25
50 / 24.1.28 / 대남초~선재대교 / 13.8
51 / 23.12.3 / 선재대교~대부도 / 18.9
52 / 23.12.10 / 배곧한울~대부도 / 18.8
53 / 23.10.8 / 배곧한울~시흥연꽃파크 / 18.1
54 / 23.8.13 / 시흥연꽃파크~소사역 / 17.06
55 / 23.7.2 / 부천오정대공원~소사역 / 14.04
56 / 23.9.3 / 오정대공원~아라김포터미널 / 16.46
57,58 / 23.9.17 / 아라김포~새솔학교 / 20.4
59,60 / 24.5.19 / 새솔학교~대명항 / 18.42
총 51회 / 22.3~24.5 / 누적거리 973.55km
길이 아름다운 이유는 다양한 모습의 길이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숲길에서 논길로, 마을길로, 찻길로, 갯길로, 강길로, 바닷길로, 다시 숲길로...
한 여름 땡볕 더위에 차도에서 고생하다 보면 어느 순간 숲길이 나오고 힘든 고갯길도 어느덧 평탄한 마을로 연결된다. 실타래처럼 가늘고 길게 이어져있는 길을 걷다 보면 우리의 인생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굽이굽이 흐르는 강길을 따라 걸으면서 강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고 깊고 울창한 숲 속을 걸으면서 숲의 존재에 감사했다. 마을과 마을 사이에 산과 강, 숲, 들 그리고 갯벌이 연결되어 있어 자연의 고마움과 위대함을 새삼 느끼곤 했다.
걷는 속도 4km, 달리는 속도 10km, 자전거 속도 20km, 자동차 속도 80km. 이 중에서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속도는 무엇일까? 시속 4km로 걷다 보면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소중하게 보인다.
언젠가 차를 타고 가다가 신기한 경험을 했다. 스쳐가는 그 마을이 어디선가 많이 본듯했다. 어? 여기가 어디지? 낯이 익은데…
나와 아내는 서로 쳐다보다가 동시에 깨달았다. 몇 달 전에 걸었던 마을이었다. 경기둘레길 24코스 가평 설악면이었다. 아.. 걸어보니 보이는 거구나.
걷다 보면 순간순간 눈앞에 있는 길에 집중하게 된다. 돌부리에 걸리지 않을까 조심하고 흙을 밟거나, 나뭇잎을 밟거나, 돌을 밟거나, 계단을 오르거나, 물을 건너거나 차도를 건널 때도 신경을 쓰면서 걷는다.
더 걷다 보면 어느 순간, 길에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도 잊게 된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걷는 상태가 된다. 오로지 지면에 닿는 발바닥의 통증과 무릎으로 무게감만 전해진다.
그리고 더 걷다 보면 아무 생각 없이 무념무상 그저 걷게 된다. 아무런 감각도 자극도 없다. 나는 이 상태를 '걸멍'이라고 부른다. 걸멍은 불멍이나 물멍과 비교해서 훨씬 치명적인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이제 일주일에 한 번씩이라도 걷지 않으면 발바닥에 가시가 돋친다. 일요일에 길을 걷지 않으면 다음 주 일주일 동안 활력이 없을 정도로 워킹 홀릭이 되어갔다. 빨리 일요일이 되기를 고대했고, 일주일 내내 다음 코스에 대해서 정보를 찾는 게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되었다.
아내는 나보다 훨씬 더 잘 걷는다. 내가 아내의 걷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걷다 보면 아내가 어디까지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일주일에 한 번씩 걷는 나와 다르게 거의 매일 만보 이상 걷는 아내는 걷는 체력이 나보다 훨씬 더 강하다.
아내는 최근 정기검사에서 담당 의사에게 큰 칭찬을 들었다. 지금의 건강 상태가 병원 처방약의 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울 만큼 좋아졌다는 것이다. 의사가 그 이유를 궁금해하길래 걷기를 꾸준히 하고 있다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럴 줄 알았다고 극찬을 하더란다.
경기둘레길 973.55km.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성취를 이뤄낸 것 같아서 뿌듯하지만 혼자라면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아내가 있었기에 시작할 수 있었고 함께라서 가능했다.
대중교통을 찾아주는 앱과 둘레길을 안내하는 앱, 그리고 걸어간 길을 기록해 준 앱의 도움도 컸다. 모든 길을 동행하며 나에게 인생을 바친 두 켤레의 신발은 일등공신이고.
내 몸의 무게와 배낭의 무게가 고스란히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중력을 감내하면서 걸을 때 비로소 길과 마을과 산과 들과 강이 온전히 몸으로 전해진다. 사람의 걸음을 대신해 주는 이동 수단의 타이어로는 경험할 수 없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발바닥을 통해서 전해오는 이 느낌은 땀 흘려 몸으로 일할 때 얻는 성취감과 같다. 한 발, 한 발,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내가 살아있음을 알게 해 주고 걷는 게 인간의 본능임을 일깨워준다.
두 발로 걸어봐야 길이 보인다. 타박타박 느리게 걸어봐야 길섶의 풀이 보이고 꽃이 보이고 나무가 보이고 돌부리가 보인다. 걸을 때만 길의 속살을 느끼게 되고 길의 체취를 알게 된다. 마을이 보이고 사람이 보이고 내가 보인다.
경기둘레길을 다시 걷기로 했다. 다시 걸어도 가슴이 뛸 것 같다. 스치고 지나갔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숨어있던 또 다른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두 번째에는 조금 더 풍성하고 친절하게 걸어보고 싶다.
십 년 뒤, 이십 년 뒤에는 어떻게 변해있을까?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겠지. 인생의 덧없음이란… 짧은 인생, 뭐 있나? 걸을 수 있는 마지막 기력이 남아있을 때까지 걷자.
인간은 태생적으로 걷는 동물이다. 걷기는 운동이 아니라 본능이다.
직립보행하는 인간! 호모 워커스(Homo walkers)!
아내와 내가 얻는 결론이다.
나는 걷는다. 고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