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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이옴 Oct 09. 2024

왜 바다 끝까지 가면 떨어진다고 생각했는지 알겠어

진부한 곳, 생경한 감상

생각 없이 가면 그냥 보던 자연인데 의미 부여하면 특별해지는 곳들을 좋아하는가 보다. 캐나다 빙원 위에 있을 때 수백 년 전 사람도 서 있던 곳에 내가 서 있다는 데 경건해는데, 포르투갈 호카곶에서도 '세상의 끝'에 왔다는 데 비장해졌다.


호카곶에 있는 탑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Aqui......
Onde a terra acaba
e o mar comeca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



이곳이 정말 세상의 끝으로 여겨질 시절에 포르투갈 시인 카몽이스가 대서사시 '우지 루지아다스(Os Lusíadas)'에 쓴 구절이다.


지금 우리는 이제 이곳이 세상의 끝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그렇지만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 그러니까 내가 사는 나라가 있는 대륙에서 서쪽 끝으로 죽 걸어갈 수 있다면 마지막에 도착하는 곳이라는 것만으로 분히 낭만적이었다. 그들도 바다에서 항로 개척을 했는데도 육지를 '세상'이라고 표현한 것은 왜일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고등학생 때 지리 시간에 우리나라는 지평선을 보기 어려운 지형이라고 배우면서 지평선을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고, 지평선에 대한 어떤 기대가 생겼다. 평선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여전하지만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의 국민으로서 수평선에 대한 기대는 없는 편이었는데, 뜻밖에도 이곳에서 의외의 사실을 깨닫는다. 울산과 부산에서 오래 살았던 나는 어디에나 바다가 있었는데 나의 등 뒤를 제외한 3면이 바다인 육지에 가본 적은 없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도 뒤를 돌면 육지가 가득했다. 이곳 호카곶에서 생경한 수평선을 마주했다는 이야기다.



호카곶은 거센 파도가 치는 낭떠러지 위에 있고, 떠러지임을 느끼고 바람을 맞으며 서 있으니 혹시 내가 전생에 전장에 나서는 영웅은 아니었을까 싶다. 묘하게 용감해지고 모험을 해야 할 것만 같다. 이 나라의 항해자 바스코 다 가마가 항로를 찾아 떠난 게 어쩌면 이런 부름에 홀리듯 응한 건 아니었을까. 이곳에 대해 상상할 때 딱히 파도를 떠올려본 적은 없지만 센 파도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음악을 잘 고른 영화처럼.


절벽 위에서 한 바퀴 돌아보니 등 뒤를 제외하고 온통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작은 섬 하나 없이 바다와 하늘만 펼쳐지니 정말 세상의 끝이 맞을 것도 같다. 어릴 때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읽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배를 타고 멀리 갔다가 돌아오는 왕의 아들이 살아서 돌아오면 흰 돛을, 돌아오지 못하면 검은 돛을 달고 오겠다고 했는데, 아들이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슬픔에 흰 돛으로 바꿔 다는 걸 깜빡했고, 이를 본 왕이 바다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 만화에서 함께 설명했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검은 돛이 먼저 보였을 거라고 했다. 조금 더 기다렸으면 서 있는 아들도 보였을 텐데. 지구가 둥글다는 증거로 자주 언급되는 예시다. 호카곶에서 대서양을 보고 있으니 저 끝에서 돛단배가 나타날 것만 같다. 절로 이런 생각들이 드는 걸 보니 세상의 끝인지 아닌지 논의하기에 참으로 적절한 환경이다.


아무리 잘 찍은 사진과 영상이 있어도 내가 하는 여행은 다르듯, 별것 없는 진부한 곳 같아도 의미만으로 낭만적이기도 하고 공기와 볕과 온도가 기분 좋은 생경함을 주기도 한다.


은 여기서 "옛날 사람들이 왜 바다 끝까지 가면 떨어진다고 생각했는지 알겠어"라고 했다. 우리의 구구절절한 생각을 뒤로하고 호카곶에 대한 기억은 이 구절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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