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끔했다. 아, 그러네. 내가 무어를 좋아한다, 안 좋아한다, 라는 말을 많이 한다. 같은 부서라는, 그러니까 언제든 끊길 수 있는얄팍한 줄로 연결된 사이에, 나의 취향에 대해 많이도 이야기했다.엄마가 말이 많은 사람은 말로 망한다고 했는데—엄마도 말이 많긴 하지만. 말에는 힘이 있다고 믿는 편이라 늘 단어 하나 조심해서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편한 자리에서 그렇게 내 이야길 한다. 누가 물어본 거도 아닌데.
호불호가 명확하다는 건 좋은 걸까 안 좋은 걸까.
이내 생각한다. 꼭 좋거나 좋지 않은 게 아니다. 다만, 나의 '불호'의 표현이 타인의 그날의 분위기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길, '호'의 표현이 타인에게 원하지 않는 나의 들뜸을 전달하지 않길바란다.
경계하기로 하지만 쉬이 되진 않는다. 나는 호불호가 명확한 사람이 맞고,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분명하게 말하는 때가 많다. 다들 좋아한다, 안 좋아한다, 라는 말을 많이 하고 사는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물어보지 않았는데 자주 표현하지 않는 거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건 호불호가 강하다는 것이 '호'뿐만 아니라 '불호'도 강하다는 걸 의미하며,그 부분이 유독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고등학생 시절 나는 자존감이 낮은 편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내게 넌 딱히 사춘기가 없었어, 라고 하지만 유별난 사건이 없었거니와 엄마가 말랑말랑한 사람이어서 그렇게 여겼으며 가출 같은 큰 사건이 없었을 뿐 자존감도 낮고 싫어하는 게 많은 평범한 십 대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때 언젠가 친구가 너는 왜 이렇게 비관적이냐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부정적인 게 아니라 비관적. 단지 나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관점을 갖고 있는 것.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충격이었던 지점은 내가 비관적이라는 게 아니라 그걸 친구에게서 직접 들었다는 거였다. 친구의 표현은 정확했고, 나는 내가 비관적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친구가 이 이야길 꺼내기 전엔 몇 번의 삼킴이 있었을 터. 얼마나 그게 나쁜 기운으로 다가왔으면 이야기를 꺼냈을까.
다행히도 대학 생활의 시작과 동시에 내게 있는 줄 몰랐던 나를 발견했다. 긍정적인 부분이 나에게도 있었고, 대학 생활이 재미있어서였는지 사춘기가 끝나서였는지, 어느 날 그 친구는 내게 예전과 달라졌다고 했다. 내가 나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줬으니 처음에도 그때도 그 이야길 해준 건 정말 고마운 일이다
그리고 고등학생, 대학생을 거쳐 직장인 8년 차가 된 지금불호를 표현하는 나를 보며 그때를 떠올린건 요즘의 나에게서비관적이었던 나를내심 느꼈기때문일까. ㄷ의 무한 긍정과 응원이 나의 일말의 부정도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일까.아니면 아무래도 직장 생활이란 게 캠퍼스 라이프보다야 팍팍하기 때문일까.
ㄷ은 좋다는 표현을 많이 한다. 이번 여행 네가 계획을 정말 완벽하게 짠 거 같아, 너무 재미있어! 날이 흐리니까 덥지도 않고 산책하기에 딱 좋네! 비 오니까 미세먼지도 없고 환기하면 되겠다!집에서 쉬려고 했는데 나오니까 바람도 쐬고 기분이 너무 좋아! 집에서 이렇게 너랑 푹 쉬면서 맛있는 거 먹는 거도 너무 좋네, 날씨도 좋고 드라이브하기 딱이다!심지어 얼마 전에는 건강검진에 수면 내시경이 포함되어 있어 운전이 어려워 함께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이렇게 너랑 오랜만에 지하철 타고 가니까 우리 여행 가는 것 같아!"란다. ㄷ은 '호(好)'를 많이 표현하는 사람이다.
ㄷ에게서 좋은 에너지를 많이 받는다, 그의 '~좋아'들이 나를 기분 좋게 한다. 그렇다면 나의 '불호'는 역시 누군가 기분 좋지 않을 수 있게 할 수 있다, 라는 가설이 번뜩였다.
"나, 부정적인 편인가?"
"그런 편이긴 하지?"
"정말?"
"응, 예전에 친구가 비관적이라고 했다고 말했을 때 조금 공감했어."
따뜻한 좋아쟁이—이것도 좋다, 저것도 좋다 하니까— ㄷ은 예상치 못한 대답을 내놓았다. 호도 불호도 아닌 팩트를. 아니라거나, 모두가 그럴 때가 있다거나 하는 대답을 기대했나 보다.
"비관적? 부정적이야?"
"응, 좀 부정적인 편이지. 비관적까진 아니고."
이렇게 비치고 있었다니. 기본적으로 안 좋게만 본다는 '비관'이 아니니 다행인 건가. 생각하고 있으니 ㄷ이 한 마디를 덧붙인다.
"왜? 누가 너 보고 그렇대? 이전엔 그랬는데 지금은 그 정도 아닌 거 같은데."
K.O. 나, 불호가 강한 게 아니라 부정적일 수도 있겠구나. 호불호가 명확하구나, 하는 말은 안 좋아하는 것도 많구나, 였을 수도 있겠구나. 그래서 내가 뜨끔 했을 수도 있겠구나.
왜 그런 생각을 했냐기에 문득 좋다는 표현을 많이 하는 ㄷ에 비해 나는 안 좋아한다는 표현—ㄷ은 감정을, 나는 취향을 말한 것이기에 표현의 성질은 다르지만—을 많이 하는 것 같다고, 그리고 그때가 떠올랐다고 하자 새로운 가설을 제시한다.
"기대 수준이 높아서 그래."
부정적인 사람은 기대 수준이 높고, 그에 비해 만족하지 못해서 부정적이게 되며, 그렇기에 일을 잘한다고. 자기는 기대 수준이 높지 않기 때문에 다 좋은 것이라고.
위로가 되어 버렸다. 무조건적인 위로가 필요할 때가 있는 것처럼, 논리적인, 아니 논리적인 척이라도 하는 위안이 필요할 때가 있다. 본인의 생각인지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런 나도 나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논리가 필요했나 보다.
결국 호불호가 명확한 게 나쁘지만은 않다며, 다만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길 바란다던 나는 그냥 좋아쟁이의 좋은 시선에 잠식당하기로 한다.호불호가 명확한 사람에게도 강점이 있을 것이지만 호불호가 강하다는 말은 주로 불호가 많은, 아니 많이 표현하는 사람, 어쩌면 부정적인 사람이 많이 듣는 말인 듯하므로, 더 이상 부정적이라는 말과의 차이를 찾으려 애쓰지 않기로 한다.
아이돌 그룹 아이브의 장원영식 사고로 한동안 밈이 되었던 '원영적 사고'가 인기였다. 긍정적임을 넘어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긍정하는 것. 복잡한 이야기들을 차치하고 역시 긍정하는 사람이 호감인 건 분명한 사실이다. 호불호가 강한 내가 모든 게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호불호가 명확하지만 기대 수준이 높을 것인 사람 말고, 호불호가 명확하지만 불호를 자주 표현하지는 않는 사람, 정도가 되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