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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이옴 Sep 30. 2024

버킷 리스트란 만들지 않는 것

나는 버킷 리스트를 만들지 않는다. 한때 버킷 리스트하는 게 유행하고 수업이나 프로그램에서도 '나만의 버킷 리스트 만들기' 같은 걸 하곤 했는데, 나는 그게 그렇게 무서웠다.


시도를 해본 적은 있다. 기껏 단어 몇 개 쓰는데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고 쓰느라 시간이 걸렸지만 네다섯 개쯤 썼던가. 그런 걸 좋아하진 않았지만 글자로 쓰고 말로 뱉어야 반드시 지킨다던가 이루어진다던가 하는 말이 유행했기 때문이다. 뭐라더라, 글로 남긴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버킷 리스트를 이룰 확률이 몇 퍼센트가 높았다던가? 꿈꿔본 적 있는 걸 이루지 못한 사람들의 퍼센트에 내가 포함될까 봐 못 이겨 쓴 거였다. 그러니까, 나는 분위기에 협박받았다.


버킷 리스트는 시한부를 선고받은 주인공이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해나가는 내용의 영화가 나온 이후로 히 쓰이게 됐다고들 한다. 그 영화의 이름이 '버킷 리스트'다. 근데 사실 왜 버킷(양동이)이냐면, 옛날에 교수형에 처하거나 자살하는 사람들이 뒤집어엎은 양동이에 올라가 마지막 순간 양동이를 걷어차 버리곤 했고, 그걸 'kick the bucket'이라고 한다고 한다. 그래서 영어사전에 'kick the bucket'을 검색하면 '죽다'라고 뜬다. 유래를 알고 나니 버킷 리스트, 역시나 살벌한 거였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걸 거국적으로 쓰고 나면 아무래도 열망에 불을 지펴 분명 실행할 용기가 생길 수도 있다.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썼기 때문에 이룬 사람들이 많다고는 하니까. 그런데 이루지 못한다면? 실행하지 못한다면? 스스로가 한심하지 않을 리가 없다. 용기가 없고 게을러서 안 쓰는 거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거냐 묻는다면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변명하자면,  열망하고 꿈꾸는 것이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간의 열망이란 그 자체로 아름답다. 나의 열망이 물리적으로, 그러니까 제목까지 붙여가며 글자로 실체화되는 것은 오히려 패배감을 줄 명분이 될 것만 같다. 나는 정말 괜찮은데.


웃기지만 버킷 리스트가 패배 리스트가 되지 않도록 실현 가능한 것들로 가볍게 쓰라고도 하는데, 그러는 순간 버킷 리스트가 버킷 리스트가 아닌 투두 리스트(to-do list)가 되는 것 같달까.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쓰는데 세 달 내에 5킬로그램 빼기, 이러면 시시하지 않나? 왜, 죽기 전에 5킬로그램을 빼고 싶을 수도 있지, 라고 한다면 뭐, 버킷 리스트에 대한 나의 감상이 이렇다는 것일 뿐 타인의 버킷 리스트에 입을 댈 생각은 전혀 없다.


어쨌거나 나에게 버킷 리스트는 좀 더 대단하게 들린다는 면에서 ''과 닮아 있는 단어다. 대학생 때 네이버에서 20대를 위한 콘텐츠를 만드는 대외활동을 한 적이 있는데, 개인 콘텐츠가 있고 팀 콘텐츠가 있었다. 당시 마지막 팀 포스팅으로 꿈이라는 소재를 택했다. 마지막 포스팅이니만큼 눈길을 끌어봐야지, 하지 않고 담백하게 20대 우리의 마음을 풀어보자,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포스팅은, 나름대로 대박이 나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고 저마다의 이야기를 꺼내놓은 댓글들도 많았다.



팀원들과 이야기하다 보니 꿈에 대한 관점이나 접근 방식이 모두 다른 게 흥미롭고,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데 위로를 받아 기획한 거였다. 어디에선가는 꿈을 크게 가져라, 다른 데서는 실현 가능한 꿈을 꾸어라, 하기도 하고 꿈은 목표와 다르다고도 하다가 가지는 거 자체가 중요하다고도 했다. 이런 식으로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듣다 보니 오히려 갈 길을 잃은 느낌이곤 했다.


우리의 꿈은 직업이 아니라 뭐가 됐든 행복한 사람인 것이기도 했고, 꿈이 있지만 소중하고 평가받고 싶지 않아서 남들에게 말하고 싶지 않기도 했고, 꿈이 없지만 그런대로 행복하기도 했다. 사실 이 중 첫 번째가 나였는데, 초등학교 때 학원 영어 선생님이 꿈을 명사가 아닌 형용사로 가지는 게 좋다고 한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지금이야 많이들 하는 말이고, 그때의 많은 기억이 흐려졌지만 그날 그 말만은 기억한다. 그냥 '행복한 사람', 이 아니라 '뭐가 됐든 행복한 사람'인 것은 내가 뭐가 됐고 뭘 하고 있든 나름대로 그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길 원해서다. 그리고 사실은, 무서워서 버킷 리스트라 이름을 붙이진 않았지만, 나에겐 죽는 순간의 일은 작가였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이 있다. 그래, 버킷 리스트보다는 바람, 정도가 담백하겠다.


내가 죽어 누운 자리에 묘비─요즘은 주로 납골당이지만─가 있다고 생각해 보자.


구 OO회사 직원 OO 이곳에 잠들다

구 OO시청 공무원 OOO 이곳에 잠들다


꿈이라고 하기에, 버킷 리스트라고 하기에 적어도 나한테 이것은 부족하다. 죽음 이후에도 영광이 될 것 같지 않다. 물론 이건 내 생각이다. '지중해 서퍼 OOO, 이곳에 잠들다'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모두에게 업이 가지는 의미는 다르니까.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 이건 다르다.


글 쓰던 OO 이곳에 잠들다


이 정도면 음, 조금 멋있다. 그런데 일단 나는 지금 작가가 아닌 직장인이고, 내가 글을 쓴다고 누가 그걸 아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어릴 적부터 몇 번을 바꿔왔던 장래희망 중에서도 변하지 않던 나의 이 바람이 깨질까 봐, 소중하게 지켜온 갈망을 부담으로 만들어 버릴까 봐 조심스럽다.


래서 나는 버킷 리스트를 만들지 않는다. 그저 실패해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자 이렇게 조금씩 글을 쓰는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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