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 나는 다시 삶을 쓰기로 했다.
2024년 4월 21일 새벽, 내 심장이 더는 뛰기를 거부했다.
정확히는, 거의 멈추기 직전이었다.
새벽 5시 10분.
오십 년 넘게 쉼 없이 뛰던 심장이 극심한 통증과 함께 무너져가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왼팔이 저리다 풀리기를 반복했다.
그날은 달랐다.
팔 전체와 턱까지 저리는 통증이 수십 분 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순간, 직감했다.
‘심장에 문제가 생겼구나.’
119에 전화를 걸고 급히 옷을 챙겨 입은 뒤, 아파트 입구로 내려갔다.
사방은 고요했고 앰뷸런스의 불빛도, 사이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행히 통증은 더 심해지지 않았다.
그렇게 10여 분이 흐르고 나서야
멀리서 경광등 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알았다.
새벽에는 119가 사이렌을 울리지 않는다는 걸.
그런데 단지 안으로 들어온 앰뷸런스가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는 게 아닌가.
‘아, 거긴 아니야. 이쪽인데...’
아파트 경사로를 따라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며 속이 탔다.
잠시 후 핸드폰이 울렸다.
“지금 어디신가요?”
“그쪽이 아니고요, 다시 내려오셔야 해요.”
내가 사는 아파트는 처음 오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헷갈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날은 내 목숨이 달린 순간이었다.
‘이게 뭐 하는 거야…’
기다려도 오지 않자, 어쩔 수 없이 경사로를 따라 올라갔다.
모퉁이를 도니 앰뷸런스가 유턴을 하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좁은 공간 빽빽한 차량들.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정말 위급한 환자였으면 기다리다 죽었겠네.’
차에 다가가자 조수석 창문이 열렸다.
“혹시 119에 전화하셨어요?”
“예, 제가 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차를 돌릴게요.”
그 순간 나는 무심코 말했다.
“제가 자동차학원에서 대형면허 강사였는데,
제가 할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살만 했고,
살고 싶었다는 뜻이었겠다.
“아뇨, 괜찮습니다. 뒤에 타세요.”
뒷 문이 열렸고 구급대원이 손짓했다.
“여기로 타세요.”
차에 오르자마자 혈압을 재고, 산소줄을 꽂고,
증상을 확인했다.
짧은 문답 사이, 차는 병원으로 향했다.
차로 2분 거리도 채 되지 않는 곳.
나는 걸어서 응급실로 들어갔다.
그곳에서도 혈압과 산소,
그리고 알약 하나.
“혀 밑에 넣고 천천히 녹이세요. 절대 씹으시면 안 돼요.”
가슴의 답답함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검사가 끝나고 의사가 말했다.
“급성 심근경색 같습니다.
심장내과 선생님 호출하고 바로 시술하겠습니다.”
간호사가 다가와 물었다.
“응급 시술이 필요한데 보호자랑 오셨나요?”
“아니요. 혼자 삽니다.”
“그럼 연락 가능한 가족은요?”
“… 없습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누구에게 연락해야 할지 수없이 망설였다.
누나? 동생? 후배?
이 새벽에 전화를 받는 사람은 누구라도 놀랄 것이다.
결국 매형에게 전화했다.
“여보세요?” 졸음에 겨운 목소리였다.
“저예요.”
“어, 어.. 무슨 일이냐?”
“응급실이에요. 급성 심근경색으로 시술해야 한다네요. 보호자가 필요하답니다.”
“알았다. 금방 갈게.”
전화를 끊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나는 나의 보호자가 될 수 없구나.
이제껏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 사회는 나에게 누군가를 끊임없이 요구했다.
시술은 오전 7시 30분쯤 마무리되었다.
심장 혈관에 스텐트를 삽입했고, 난 6일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가족력이 있다는 걸 알기에 열심히 운동하고
식단도 관리했건만, 모든 게 허망하게 느껴졌다.
사람의 심장은 평생 뛸 수 있는 횟수가 정해져 있다고 한다.
이제는 그 말이 마음속에 박혀 있다.
작은 통증에도 민감해졌고,
어제와 다른 몸의 신호에도 노심초사했다.
그러나 몸보다 더 큰 변화는 마음이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나는 지금 어떤 이유로 살아가는가.
정해졌을지도 모를 미래 앞에서,
현재의 나는 어떤 존재인가.
그 질문들이 퇴원 후 오랫동안 나를 붙잡았다.
겉모습은 이전과 같았지만,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몇 달이 지나,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산을 오르고 저수지를 걷고,
내가 좋아했던 일상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그리고 1년이 지난 5월,
병원에 들러 진료를 받을 때 의사가 말했다.
“환자분은 운이 좋으신 거예요.
이 병은 많은 분이 응급실에 실려 오시기도 전에 돌아가십니다.
이제는 스텐트도 잘 자리를 잡은 것 같으니
다음 내원 땐 전체적으로 검사해 봅시다.
그동안 건강관리 열심히 하셔야 해요.
좋은 결과가 나오면 기분이 좋으실 거예요.”
병원을 나와 저수지 주변을 걷다 생각했다.
길가에 놓인 돌멩이도,
피어난 들꽃도 나름의 쓰임이 있겠지.
내가 그날 살아남은 것도,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내가 해야 할 무언가가 남아 있어서일 수도.
그날 집에 돌아와 흩어진 글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심했다.
내 글을 세상에 내놓아 보기로.
2025년 6월 19일 오후,
세 편의 글을 골라 브런치 작가에 지원 했다.
다음 날은 대학 선후배들과 진도로 떠나는 날이었다.
출발하는 아침부터 비가 내렸고, 안개가 자욱했다.
진도로 향하던 차 안. 한 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브런치스토리 작가님,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그 순간, 뛸 듯이 기뻤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닿았다는 사실.
내가 살아왔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안도.
이제는 나만 알고 있던 넋두리 같은 이야기들을
'세상에 내어 놓아도 괜찮아' 하는 위로 같은 메일이었다.
그 후 한 달,
십여 개의 글을 올렸고, 댓글과 공감도 받았다.
나는 아마 결혼도,
아이를 낳는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세상에 살아있었다는 증거를
이렇게 ‘글’로 남기고 싶다.
내가 선택한 삶이 결코 외따로인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홍콩 작가 찬호께이의 『망내인』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가끔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 바보같이 느껴진다.
친구 추가도 하지 않고 모든 글을 비공개로 해두었으니까.
아무도 보지 않는 걸 알면서도
글을 쓰는 게 숨어서 한탄하는 것처럼 보일까? (...)
하지만 여기에 일기를 쓰면,
관리자가 우연히 내 근황을 볼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는 내가 누군지 모른다.
나 역시 그가 누군지 모른다.
우리는 서로 낯선 사람이다 "
내가 왜 카카오 스토리에 비공개로 글을 써왔는지를
이보다 더 정확하게 설명해 주는 건 없다.
가까운 사람의 부재는 어떻게 오든,
결코 받아들이기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생의 변곡점이자,
남겨진 이들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흔적이 된다.
나는 나의 죽음이 남은 사람들에게 슬픔으로만
기억되길 원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혼자 살다 가버린 사람들을
몇 가지의 단어로 정리해 일반화해 버린다.
그래서 나의 글쓰기는,
그런 일반화에 대한 조용한 저항이자,
나만의 삶에 대한 작지만 단단한 선언이다.
"나는 나의 심장이 열심히 뛰는 동안
주어진 삶을 충실히 살았으며,
사는 동안 외롭거나 슬프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러니 아주 조금 슬퍼하고,
그대들 역시 남은 날들을 충실하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날 이후 나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미루지 않기로 했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기로 했으니까요"
이러한 이유로 이 글을 읽고 있을 '망설이는 당신'께도 말하고 싶다.
나 역시 오랫동안 그런 사람이었으며,
고요한 방 안에서 혼잣말처럼 써 내려가는 사람이었다고.
지금 당신의 머뭇거림도 언젠가 말이 되고,
그 말이 문장이 되어 누군가의 하루를 붙잡아 주기를 바란다고.
“만약 당신이 내 글을 읽는다면, 댓글을 달지 않아도 나는 기쁠 거예요.
혼자서 한탄만 하는 사람들보다 내가 조금 나은 거니까.”
– 찬호께이, 『망내인』
2025년 7월 12일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