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방아쇠에서 멀어지는가
전쟁은 이념과 이념, 종교와 종교, 민족과 민족이 충돌하며
인간이 스스로에게 가하는 가장 극단적인 폭력이다.
자연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만큼만 해를 끼친다.
하지만 그 법칙에서 유일하게 벗어난 존재가 인간이며,
그들이 벌이는 전쟁은 자연에는 없는 비정함의 극치이다.
고대의 전쟁터에서는 자신의 칼과 화살에 죽어가는 이를 직접 봐야만 했다.
나로 말미암아 죽어가는 이들의 눈을 차마 보지 못해
고개를 돌리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고대의 전쟁보다 지금의 전쟁이 덜 잔인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언제부터 전쟁은 이렇게 잔혹해졌을까?
죽이는 자와 죽임을 당하는 자의 물리적 거리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가해자가 입는 상처도 커졌다. 그게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그래서 인류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거리를 점점 벌려왔다.
돌팔매에서 투창, 활을 지나 총과 미사일까지...
전쟁은 점점 '직접 마주하지 않고도 죽일 수 있는' 싸움이 되어갔다.
게다가 화약이 전장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자
전쟁은 '더 멀리서, 더 많이, 더 쉽게' 죽일 수 있는 방식으로 진화했고
전장에서 죽음과의 거리가 멀어지지자, 죄책감과 책임감도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전에 이르기 전까지는
병사들은 여전히 죽어가는 생명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고,
그 충격은 문학과 미술 작품으로 남아, 반전과 평화에 대한 외침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금의 전쟁은 다시 달라졌다.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드론을 조종하고, 마우스로 누군가의 마지막을 조작한다.
이제는 직접 살육의 현장을 지켜보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면 화면 속 좌표 하나가 누군가의 삶이었음을 더는 느끼지 않아도 되는 전쟁.
그것이 과연 덜 잔인하고, 더 인도적이며 더 문명적인가
현대의 전쟁은 그것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지 않는다.
그들의 가족도, 친구도, 심지어 자신들마저도 그곳에는 없다.
그들은 가장 안전한 곳에서, 깨끗한 옷을 입고, 시원한 물을 마시며,
고상한 말로 가장 잔인한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말한다. "최선이었고,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들이 말하는 최선은 '가장 큰 이익'이었으며
'어쩔 수 없음'은 최후의 수단이 아니라 가장 쉬운 선택이었다는 것을.
전쟁 당사자 중에서 가장 잔인한 의사(意思)를 가진 인간,
즉 전쟁 개시를 결정하는 최고 권력자만큼
죽음과 가장 멀리 떨어진 위치에 있는 사람은 없다.
백악관의 만찬장에 앉아 있는 대통령은 적의 피를 뒤집어쓰지도 않고,
육체가 산산이 부서진 전우의 단말마를 듣지도 않는다.
살인에 따르는 정신적 부담조차 받지 않는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날 때부터 인간 안에 있던 잔혹성을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가장 무자비하게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 다카노 가즈아키 『제노사이드』 중에서
이제 이러한 잔혹함은 몇몇 권력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쟁은 더는 전장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우리와 '다름'이 '차별'이라는 이름으로 일반화되고
그 차별이 익명성 뒤로 숨게 되면
전쟁에 동원되는 무기는 한 편의 동영상, 짤막한 뉴스,
교묘히 편집된 사실들의 나열등으로 대체된다.
그리고 이러한 무기는 ‘공공의 안녕’, '알 권리'라는 말로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사무실에서, 집에서 수많은 이들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온라인 댓글창에서 누군가를 ‘정당하게’ 매장시키고,
직장에서의 따돌림을 방관하고,
'불편한 사람’과'불편한 상황'을 애써 외면하거나,
다른 의견을 낸 사람에겐 “분위기 파괴자”라는 꼬리표를 붙인다.
약한 자의 고통을 “예민해서 그래”라며 밀쳐내고,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지킨다.
이렇게 '우리'를 제외한 이들을 철저히 배척의 대상으로 삼은 채 발화되는
‘국가 안보’, ‘보편적 가치’, '사회적 통념', ‘정당한 응징’등의 구호는
한 명 한 명의 구체적인 죽음을, 존재를 부정당한 수많은 이들의 고통을,
익명의 숫자로 바꾸는 주문이 된다.
그리하여 가장 살벌한 결정을 내릴 때조차, 이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내려진 결정이 집행되는 순간
결과에 대한 책임은 모두에게 분산되며,
이렇게 분산된 책임은 어느 누구의 어깨에도 내려앉지 않고
허공으로 흩어진다는 데 있다.
이 '책임의 분산'은 집단의 목적을 더욱 합리화시키고,
개개인의 도덕적 감각을 마비시켜 면죄부를 부여하며,
면죄는 종종 그들의 행동을 강화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유대인 학살을 지시한 나치 전범 아이히만이 괴물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고 성실한 관료”였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자신이 한 일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고, 그저 명령에 따라 일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아렌트는 이를 ‘악의 평범성’이라 명명하며,
윤리적 판단을 유보한 채 체계 속에 자신을 흡수시키는 것,
바로 그 무사유의 태도가 가장 잔혹한 악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전쟁이 이 지경에 이르면 더 이상 국가 대 국가의 충돌이 아닌,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모두가 모두에게 등을 돌리는 단계에
접어들어 새로운 형태로 전개된다.
우리는 말한다. “나는 직접 해코지한 적 없어.”
하지만 방아쇠는 손가락이 아닌 시선만으로도 당길 수 있고,
때로는 침묵으로도 당겨진다.
말하지 않고 넘긴 침묵, 웃음으로 얼버무린 조롱, 불편함을 피하기 위한 외면들.
전쟁은 그런 마음들이 모여 만들어진다.
지금의 전쟁은 총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고 해서,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총만 없을 뿐, 구조는 같다.
우리가 그 사실을 직시하는 것.
그리하여 타인의 고통에 기꺼이 연결되고,
비겁한 침묵 대신 불편한 연대를 선택하는 용기를 내는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는 비로소 전쟁의 방아쇠에서 손을 뗄 수 있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팔레스타인의 안녕을 기원하며 2025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