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003
[홀로 떠난 유럽을 그리다] 가 브런치북 공모전에서 은상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카사 밀라와 카사바트요는 가까이 위치해 있다.
돈 페드로 밀라 이 캄프스라는 사업가가
카사바트요를 보고 반해서 가우디에게 의뢰한 집이 카사 밀라다.
당시 카사 밀라는 최신 공법으로 지어진 최고급 빌라였다.
밀라의 집이라서 카사 밀라라고 부르거나
채석장이라는 뜻의 '라 페드레라'라고 부르기도 한다.
카사 밀라는 기다리는 줄이 길지 않았다.
입장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에 도착한 순간 감탄이 나왔는데
재미있었던 것은 내 옆에 있던 사람들도 그랬다는 거다.
어서 와아- 하고 말을 거는 듯한 굴뚝들. 자세히 보면 깨진 샴페인 병의 모양이 보인다.
카사 밀라의 굴뚝은 스타워즈 시리즈의 투구 모양 모티브가 되기도 했는데,
조지 루카스가 카사 밀라를 방문하고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가우디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도 굴뚝 모양의 모티브를 이용했다.
독특한 굴뚝으로 유명한 옥상은 그 모양 자체가 특이하기도 했는데
계단을 걸으며 옥상을 구경하는 기분이
커다란 공룡의 위를 걷는 개미가 된 것 같달까.
신기하고, 다른 세상에 온 것 같고, 재미있었다.
옥상이 이런 모양이 된 것은 바로 아래 다락방을 만들었기 때문인데,
포물선모양으로 돌을 쌓으며 높이에 변화를 주었다.
다락방 공간에 있는 카사 밀라의 건물 모형. 사그라다 파밀리아와 카사 바트요의 모형도 있었다.
옥상 아래의 다락방은 공룡의 뱃속에 들어온 듯 재미있는 공간이다.
우와- 하며 구경하는데 머릿속 한쪽에서는 '여기를 청소하려면...'
하는 생각이 꿈틀댔다.
아래에 있는 거울을 통해서 오른쪽의 형상을 볼 수 있다. 중력을 이용한 설계.
카사 밀라가 완성되던 1910년에는 '거장 가우디 전'이 파리에서 열리기도 했다.
그의 나이 58세였다.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카사 밀라에 대한 반응은 좋지 않았다.
건물의 모양이 지금 봐도 새롭고 독특해서
당시에는 더욱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아마 카사 밀라는 여러모로 가우디를 피곤하게 했을 것이다.
밀라부부와 돈문제로 충돌하게 되었고, 보수를 요구하는 소송까지 하게 되었다.
다행히 재판에서 이기기는 했으나 밀라부부와 절교하게 된다.
가우디는 승소하여 받은 돈을 모두 사그라다 파밀리아 공사비에 기부했다고 한다.
의뢰인 밀라씨도 난처하지 않았을까.
초기 예산보다 공사비도 초과한데다
부인은 가우디의 건축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시청은 건물이 도면면적을 넘고, 다락방이 허가받은 높이보다 높다는 이유로
철거하라는 요구와 벌금 통지서까지 보냈다.
이후에 시에서 취소하긴 했지만 벌금 통지서를 받는 순간 정말 속이 터지지 않았을까.
가우디에게 돈을 지불하려고 건물을 저당 잡혀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고 하니
밀라씨도 마음 고생이 참 심했을 듯하다.
시에서 철거 요구를 취소하지 않았으면 지금의 재미있는 다락방과 옥상도 볼 수 없었을 테니
시의 결정은 밀라씨에게도, 가우디 아저씨에게도, 나에게도 여러모로 잘된 일이다.
내가 카사 밀라를 봤을 때 굴뚝 다음으로 재미있어했던 것은 독특한 발코니 난간의 모양이었다.
바다에서 주워온 미역 같지 않은가?
나뭇잎을 묘사한 거라지만.. 색도 그렇고 미역 같다. 헛헛..
어떻게 1910년에 완성한 건물에 난간 모양을 저렇게 할 생각을 다했지?
라고.. 나는 여전히 감탄하고 있다.
가우디는 대장장이 집안의 자손이다.
금속을 다루는데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재능이 있는 것과 이렇게 디자인하겠다고 결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니까. 역시 대단하다.
1층에서는 이런 아름다운 벽화를 볼 수 있다.
실제로 보면 더 아름답다.
카사 밀라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카사 밀라를 지으며 지친 가우디는 카사 밀라 이후 더 이상 부자를 위한 저택을 짓지 않았다.
그리고,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전념하게 된다.
카사 밀라에는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다고 들었다.
나도 이런 집에 살아봤으면 좋겠다 생각이 든다.
아마도 불편하겠지만,
그래도 역시, 궁금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