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여름
서인은 집으로 돌아와 여름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적요했다. 아무도 없는 그곳은, 시간마저 멈추어 있는 듯했다. 서인은 아주 천천히, 방 안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서인의 시선이 맨 먼저 닿은 침대의 머리 쪽과 맞닿은 벽에는 금색 테두리의 화려한 빈티지 전신 거울이 세워져 있었다. 창가에는 섬세한 꽃무늬 자수가 놓인 흰색 리넨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고, 양쪽 벽 끝에는 연한 브라운색 커튼이 살포시 내려져 있었다. 폭신한 퀸 사이즈의 침대에는 아이보리색 레이스의 아사면 베드 스커트를 둘러 방 전체에 아늑하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더했다.
이 모든 것은 가을이가 예전집에서 사용하던 것들이었다. 이 집으로 이사 올 때, 여름이는 자신의 방을 언니 방처럼 꾸미고 싶다고 했고, 가을이는 흔쾌히 자신이 쓰던 것들을 내주었다. 자취방에서 사용했던 소품들도 함께 챙겨 주었다. 앤틱 한 스탠드, 우아한 유리 화병, 따뜻한 황동색의 캔들워머까지 - 모두 클래식한 느낌의 것들이었다. 모던했던 여름이의 방은 그렇게 색다른 분위기로 바뀌었다.
침대 옆 진한 올리브색의 철제 선반 위에는 취침등 겸용 가습기가 있었다. 서인이 늘 물을 채워주던 가습기였다. 그 옆에는 여름이가 잠들기 전 바르던 화장품들이 놓여 있었다. 투명한 하늘색의 수분크림, 트러블이 올라올 때 바르던 연고, 그리고 늘 쓰던 립밤. 전신 거울 앞 바닥에도 여름이가 평소 사용하던 화장품들이 제멋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화장대가 있었어야 했는데, 서인은 생각했다. 창문은 어느새 굳게 닫혀 있었다. 서인이 창문을 열자, 커다란 도시의 소음이 조용했던 방안으로 훅, 밀려 들어왔다. 서인은 실외기 너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개미만 한 사람들이 저마다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침대 위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이 밝아지며 암호 입력창이 떴다. 순간, 오래전 여름이에게 들었던 네 자리 숫자가 떠올랐다. 한 아이돌 멤버의 생일이라며 들려줬던 그 번호였다. 허겁지겁 숫자를 눌렀다. 잠금이 풀리며 화면이 열렸다. 지금 그 번호를 기억해 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여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귄 지 한 달을 조금 넘긴 도현과, 여름이는 헤어지기로 한 모양이었다. 이른 아침이나 새벽, 지원의 집에서 함께 놀다 생긴 일이었을지도 모르고, 그곳에서 통화를 하다 벌어진 일일 수도 있었다. 여름이가 도현과 사귄다는 건, 여름이에게 직접 들었기에 서인도 알고 있었다.
도현은 여름이가 자퇴 후 편입한 학교에서 새로 사귄 친구였다. 부모님의 이혼 뒤, 열 살 어린 여동생과 엄마, 세 식구가 함께 살고 있었다. 서인은 한 번, 우연히 카페에서 여름이 친구들 - 도현, 영재, 지원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날, 도현은 서인을 보자 약간 긴장한 듯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지만, 함께 있던 지원과 영재처럼 평범한 또래의 학생 같아 보였다.
여름이가 보여준 동영상 속 도현은 한층 활기찬 모습이었다. 가볍게 춤을 추듯 장난을 치자, 여름이는 까르르 웃고 있었다. 그렇게 여름이를 웃게 해주는 아이라면, 서인은 조금 안심이 되었었다.
지원은 베트남에서 12년을 살다 3월에 전학 온 친구였다. 둘은 짧은 시간 안에 빠르게 가까워졌다. 최근 지원의 부모님 사이에 이혼 이야기가 오가면서, 지원은 그 일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지원과 여름이는 서로의 힘든 마음을 나누며 더욱 깊이 친해졌던 것 같다. 4월 중간고사 이후, 지원이 입시 컨설팅을 받은 뒤 곧바로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여름이에게 전해 들었다. 서인은 지원의 자퇴가 내심 불안했지만, 시간이 많아진 지원과 여름이는 이전보다 더 자주 어울렸다.
지원의 집은 친구들이 자주 드나드는 장소였다. 여름이가 처음으로 지원의 집에서 자겠다고 한 날, 서인은 지원의 아빠와 통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부재중이던 지원의 어머니께 전해달라고 했던, 차 한 잔 같이 마시고 싶다, 는 말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여름이의 휴대폰에는 사고 이후 도착한 메시지들과 부재중 전화 기록이 남아 있었다. 도현에게서는, 다시 만나자, 는 메시지와 두 통의 부재중 전화가, 지원에게서는, 널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전화 좀 줘,라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서인은 여름이의 그날을 짐작해 보았다. 토요일 오전, 여름이는 속상한 마음으로 지원의 집을 나섰을 것이다. 넓은 횡단보도를 건넜을 것이다. 그 길은 등교하던 평일과는 달리, 쓸쓸할 정도로 한산했을지도 모른다. 집을 향해 걸었을 것이다. 평소에는 느릿한 걸음이었지만, 그날은 조금 빠른 걸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기분이 좋지 않았고, 빨리 집에 가고 싶었을 테니까. 고요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조용히 올라갔을 것이다.
무음으로 설정된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자, 잠금장치가 스르르 풀렸을 것이다. 신발을 벗고 조용히 현관을 지나쳤을 것이다. 집 안은 아무도 없는 듯 적막했을 테고, 만사가 귀찮아진, 열 살 넘은 소금이와 후추는 캣타워 위나 숨숨집 속에서, 한쪽 귀만 쫑긋 세운 채 눈조차 뜨지 않았을 것이다.
여름이는 거실을 가로질러 곧장 자기 방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서인과 재준이 자고 있는 방을 힐끗 돌아봤을지도, 아니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방에 들어가 엄지손가락으로 방문을 꾹 눌러 잠갔을 것이다. 배낭은 툭, 아무렇게나 내려놓았을 것이고, 휴대폰은 침대 위에 조심스레 놓았을 것이다.
그리고, 창문을 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