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여름
국과수 직원이 올 때까지, 한 분은 집에 계셔야 합니다, 경찰의 말에 재준이 옷을 갈아입었다. 집을 나서는 재준에게 서인이 말했다, 택시 타, 운전 안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재준은 손에 쥐고 있던 차 키를 키트레이위에 내려놓았다. 현관 앞에서 멈춰 선 재준은 잠시 뒤돌아 서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서인은 홀로 거실 바닥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평소라면 서인의 주변에 함께 있었을 소금이와 후추는, 낯선 사람들의 방문 이후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경찰이 서인에게 조심스레 다가와 말을 걸었다. 재준이 집을 나가고, 서인이 여름이 방에서 나온 뒤에도, 그들은 한동안 그 방에 머물렀던 것 같다. 두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 아이고, 저 엄마 어떡하나, 애가 어쩌다 그랬대, 집안에 문제가 있었겠지, 서인은 쓸데없이 그들의 대화를 상상했다. 그들에게 말하고 싶었다, 우리 집은, 정말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하지만 그 말을 믿어줄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서인은 이제 자신할 수 없었다.
최근 자녀분이 어디가 안 좋았나요? 우울증 증세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됐나요? 일 년 넘었습니다. 병원에 다녔나요? 최근에는 아이가 가기 싫어해서 제가 대신 갔습니다. 약 처방이 필요해서요. 가정폭력이 있었나요? 아니요, 서인은 마지막 질문이 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국과수 직원이라는 남자는 딱히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경찰과 서인에게 짧게 인사를 건네고,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여름이 방으로 들어갔다. TV에서 보던 현장 검증 장면이 떠올랐다. 서인은 거실에 그대로 있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범죄의 흔적은 없는지 확인하는 과정일 테지. 범죄 수사에 관심이 많은 재준이 그를 만났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서인의 머리를 스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에서 나온 남자는 서인에게 물었다. 요즘 자녀분에게 힘든 일이 있었나요? 언제부터 그랬나요? 가정에서 학대가 있었나요? 경찰과 짜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질문 역시 형편없었다. 장난해요? 만약 학대나 폭력이 있었다면, 지금 내가 있었다고 하겠어요? 서인은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입술을 꼭 다문 채 짧게 말했다, 아니요.
서인은 소변이 마려웠다. 일어나 화장실에 다녀왔다. 생각보다 자연스러웠다. 이런 상황에도 몸은 할 일을 했다. 자리로 돌아와 리모컨을 찾아 에어컨을 켰다. 더웠다. 숨이 조금 쉬어졌다. 숨이 막혔던 건지, 그냥 더웠던 건지 그제야 에어컨을 튼 이유를 생각했다.
서인은 동생 정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이 두어번 울린 뒤, 제부가 전화를 받았다. 제부…, 말을 하려는데 울음이 터져나왔다, 정인이 좀 바꿔주세요. 네? 제부가 되물었다. 서인이 간신히 다시 말했다, 정인이… 정인이 좀 바꿔주세요. 잠시 정적이 흘렀고, 이윽고 정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인아, 여름이… 여름이가 방에서 뛰어내렸어. 그 말을 입 밖에 내뱉는 순간, 서인은 그제야 모든 게 현실처럼 느껴졌다. 잠결에 전화를 받은 정인에게 서인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말을 쏟아냈다. 너 알지, 여름이 방 이중 커튼, 프렌치 자수 있는 거. 그게 막 휘날리더라고…, 창문이 열려 있었어. 난간이 너무 높잖아, 거긴 그냥은 못 올라가, 침대를 밟고 올라간 것 같아. 울면서 듣던 정인은 말했다, 언니, 지금 바로 갈게.
경찰도, 국과수 직원도 모두 떠난 집 안은 숨 막히도록 조용했다. 서인은 멍하니 앉아 재준의 전화와 정인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무언가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병원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정인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오지 마, 나 병원에 가려고. 정인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나 거의 다 왔어, 그냥 집에 있어. 서인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집에 도착한 정인은 곧바로 주방으로 갔다. 접시에 잘라온 사과, 키위, 포도를 가지런히 담아 서인 앞에 내밀었다, 일단 좀 먹어. 얇게 썬 사과는 아삭하고 달콤했고, 황금색 키위는 부드럽고 상큼했다. 서인은 그제야 자신이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 두 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서인이 말했다, 정인아, 나가 보자. 어디? 여름이가 있었던 데. 괜찮겠어? 정인이 물었다. 응, 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말없이 신발을 신고, 살며시 현관문을 열었다. 아파트 입구를 돌아, 천천히 뒤쪽 화단으로 향했다.
그곳엔 이미 폴리스 라인이 길게 둘러쳐 있었다. 들어가도 되는 걸까, 서인은 잠시 머뭇거리다 라인이 없는 쪽으로 돌아 들어섰다. 바닥에 경사가 있어 발을 디딜 때마다 조심스러웠다.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눈여겨본 적 없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두 팔로는 안을 수 없을 만큼 크고, 오래된 나무였다. 굵은 가지 하나가 반으로 갈라져, 그 속의 뽀얀 속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주변은 부서진 잔가지들과 잎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저만치, 무언가가 서인의 눈에 들어왔다. 질긴 검은색 데님 진이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손끝으로 그것을 들춰 올렸다. 바지는 나뭇가지에 걸렸던 듯 크게 찢어져, 치마처럼 넓게 펼쳐졌다. 여름이 바지는 아니었다. 지원의 집에 갈때면 자주 옷을 빌려입곤 했지, 이것도 아마 지원의 옷일 것이다. 서인은 흙이 잔뜩 묻은 바지를 두 손으로 들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숨죽인 기도처럼, 말이 흘러나왔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