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술무살을 기억하세요?
둘째 딸아이는 ‘술무살’이다. 스무 살이 아니라, 말 그대로 술무살. 큰딸이 파란만장한 술무살을 지나왔는데, 둘째도 어김없이 그 코스를 성실히 밟고 있다. 그래 뭐 어쩌겠냐. 너희는 내 딸이고, 아빠의 딸이니.
솔직히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나도 스무 살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해보고 싶었던 일 중 하나가 ‘술 마시기’였으니까. 다만,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서 접하는 험악한 사건들, 그리고 예전보다 훨씬 많아진 술들 앞에서 겁 없는 딸들이 걱정스러울 뿐이다.
내가 처음 술을 마셨던 때를 떠올려본다. 고등학교 2학년, 늦여름 무렵이었다. 장소는 친구 집 아파트 옆, 작고 한적한 공원. 학교를 오가며 자주 들르던 곳으로, 벤치에 앉아 책가방을 무릎에 올려놓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아지트였다. 그날은 왜 나와 그 아이만 남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평소 같으면 네댓 명, 많게는 여섯 명이 모여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다 날이 어두워지면 체념하듯 흩어지곤 했는데 말이다.
어쨌든 그날은 그 아이와 나, 그렇게 둘 뿐이었다. 그 아이가 가방에서 맥주를 꺼냈다. 어디서, 어떻게, 왜 가져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곳은 그 아이 집과는 거리가 있었으니, 아마 근처 가게에서 사 온 걸 것이다. 학생이었던 그가 어떻게 술을 살 수 있었을까. 그때는 지금보다 미성년자 술 구매가 훨씬 수월했던 걸까.
힘없는 종이컵에 뽀얀 거품이 얹힌 맥주를 한 모금 쭉 들이켰다. 곧 잔디 위에 몸을 눕혔다. 여름을 건너며 빽빽하게 자란 잔디였다. 식도를 타고 내려간 맥주가 다리 끝까지 스미는 기분이 생생했다. 마치 처음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처럼 다리가 휘청거렸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대로 누워 있었다. 정신은 또렷했기에, 우리는 두 시간가량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결국 친구에게 업혀,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다.
두 번째 술을 마신 날은 열아홉 살 가을이었다. 대입 시험이 백일 앞으로 다가온 때였다. 장소는 집에서 가까운, 친구들과 가끔 들르던 공원이었다.
“소주 한 병 다 마시면 우리도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어.”
한 친구가 호언장담하듯 말했다. 그게 누구였는지, 술을 누가 가져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시절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처럼 느꼈다. 미래는 불투명했고, 매일이 불안했고, 그냥 모든 게 버거웠다. 그 술을 마시면 정말 대학에 갈 수 있을 거라는 터무니없는 말조차 믿고 싶을 만큼 어리석었다. 아니, 어쩌면 그런 핑계가 있다는 게 그냥 재미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우리는 소주 한 병씩을 들고 마시기 시작했다. 다 마셨는지는 모른다. 병을 들고 꿀꺽꿀꺽 몇 모금 마시던 기억을 끝으로, 나는 그대로 기절했으니까. 약 여덟 시간 뒤 눈을 떴다. 내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다 지친 대부분의 친구들은 이미 집으로 돌아갔고, 단 한 아이만이 내 곁에 남아 있었다.
세 번째 술을 마셨던 기억도 있다. 그때가 바로 나의 ‘술무살’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소주 한 잔을 다 마신 동시에, 등받이 없는 의자에서 뒤로 그대로 넘어졌다. 다치지는 않았고, 함께 있던 이들이 걱정하며 안쪽 자리로 옮겨 주었다. 그날은 더는 술을 마시지 않고 조용히 마무리했다. 혹시 내가 술을 못 마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그럴 리가 없다’고, 스스로 다독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 뒤로는 너무 자주, 너무 많이 마셨다. 대학 1학년 때, 같은 과 학생이었던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는 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술을 마시고도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멋있어 보였던 그의 모습은, 그때만 해도 세월이 지날수록 그의 술 사랑이 이렇게 깊어질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야관문, 도라지, 솔잎, 마늘, 매실까지 온갖 재료로 담금주를 만들어 저녁마다 한 잔씩 애지중지 마시는 그의 모습은 참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줄지어 서 있는 담금주 병들을 거친 등 긁개로 힘껏 내리치고 싶은 욕구가 한 달에 한 번쯤 솟구치기도 한다.
남편이 이미 남자친구였을 때일까, 그전이었던 것도 같다. 남편과 친구들과 함께 1차를 마치고 2차로 노래방에 갔다. 나는 많이 마시면 토하는 지저분한 스타일이었다. 노래방 안 화장실에 가서 토하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신나게 노래를 부르던 그들은 어느 순간 내가 없어진 걸 알아채고 노래방을 나왔다. 동네방네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화장실에서 대자로 뻗어 자고 있던 나를 찾을 순 없었다.
문을 마구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성난 얼굴의 젊은 여자가, 노래방 문 닫을 시간이라며 나가라고 했다. 밖으로 나왔지만 가방도 없었고,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었다. 나는 ‘내가 누구지? 여긴 어디지?’ 잠시 멍하니 생각했다. 집까지 거리가 꽤 멀었지만, 택시를 잡아 타고 집으로 향했다.
택시 안에서 다시 토가 시작됐다. 기사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셔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토했다. 집에 도착해 엄마를 부를 생각이었는데, 집 앞에는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이 택시비를 계산했고, 나는 민망하고 정신이 없어 별말 없이 “잘 가”라는 인사만 남기고 집으로 들어갔다. 결혼한 뒤, 언젠가 그날 이야기가 나왔다. 남편이 기사님께 세탁비까지 준 사실을 결혼하고 이십 년이 지나서야 알았다.
대학교 기숙사에서 살고 있던 1학년 딸아이가 어느 날 전화를 했다.
“엄마, 며칠 전에 술 마시고 넘어졌는데, 그날부터 코가 아팠거든? 오늘 정형외과 갔더니 골절이래.”
딸아이가 전화했을 때는 이미 병원 문이 닫힌 시각이었다. 남편이 딸아이를 데리고 급히 응급실로 향했다. 한 시간 넘게 기다려서야 의사를 만났다.
“코가 너무 예쁘게 잘 부러져서, 그냥 놔둬도 된대.” 이참에 코수술을 원했던 딸은 많이 아쉬워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 뒤로도 큰딸은 이런저런 사건사고를 계속 남겼다. 남편의 사건사고는 책 한 권 분량은 족히 넘을 것이다. 모든 것은 유전자 탓이리라. 씁쓸하다.
남편은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술을 좋아하고, 나도 가끔 기분 좋게 한 잔씩 즐기곤 한다. 누군가의 ‘술무살’, 이 시절은 모두에게 지나가는 한때임을, 곧 지나갈 것임을, 그렇게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