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익어가는 창작 글쓰기
글쓰기 수업이라면 강좌명만으로도 수강생을 단번에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야 한다. 책을 고를 때 제목이나 표지가 먼저 눈길을 사로잡듯, 나는 이 수업명을 듣는 순간 등록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에게 언어란 언제나 아쉬움을 남기는데, 그보다 더 생경한 것은 언어 이전에 솟구쳐 오르는 감정일 때가 있다. 김영하 작가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서운하다’, ‘억울하다’, ‘속상하다’ 같은 수많은 감정을 우리는 ‘짜증 난다’라는 모호한 말로 치부해 버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감정을 깊이 살피는 일을 방해한다." 학생들에게 감정을 더 섬세하게 표현하라는 조언이었다.
그 후로 나는 ‘짜증 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슬픔일까, 실망일까, 아니면 아쉬움일까. 더 나아가, 약속을 잊은 상대 때문에 속상한 건지, 준비한 결과가 나오지 않아 실망한 건지, 구체적으로 따져보려 했다. 그러나 감정을 들여다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고, 질문 앞에서 드러나는 내 부족한 어휘력은 나를 위축시켰다.
〈언어가 익어가는 창작 글쓰기〉, 오늘부터 내가 듣게 될 수업의 이름이다. 갓 수확한 과일은 아직 떫지만, 시간이 지나 숙성되면 깊은 단맛을 품게 된다. 나의 언어도 이 수업을 거치며 조금은 무르익을 수 있을까. 그 과정에서 빛깔을 달리하며, 나만의 맛을 낼 수 있기를 바라본다.
수업 시간에 뒷자리를 고집하는 것은 오랜 시간 몸에 밴 나의 습관이다. 학생 시절, 선생님과 가까운 앞자리는 나의 것이 아니었다. 교과서 대신 다른 것을 들여다봐야 했고, 졸리면 눈을 붙여야 했으며, 때로는 도시락까지 꺼내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남편과 딸과 함께 서둘러 나오느라 정시에서 2-3분이 지나 교실에 들어갔다. 마침 빈자리는 맨 앞줄뿐이었고, 전혀 원치 않던 그 자리에 앉게 되었다. 입구에서 받은 강사님의 명함에는 ‘시인’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올해 초 들었던 ‘소설 쓰기’ 수업의 소설가 강사님이 떠올랐다.
일반적으로 ‘작가’를 생각하면 예민하고 까칠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지만 수강생들의 엉뚱한 질문에도 다정한 미소로 성심껏 답해주던 소설가 강사님, 그리고 오늘 새롭게 만난 시인 강사님의 친근하고 온화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적어도 내가 만난 이들만 놓고 본다면 작가들을 ‘부드러운 사람들’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수업이 끝나고, 2층 문헌정보실에서 책을 몇 권 빌린 뒤 1층 로비로 내려왔다. 높은 층고 덕분에 널찍한 로비는 시원한 개방감을 안겨주었다. 곳곳에는 잠시 쉬거나 책을 읽고, 노트북을 펼칠 수 있는 작은 공간들이 마련돼 있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저만치 멀어져 가는 여름을 붙잡으려는 짙은 초록의 나무들이 보이고, 간간이 스치는 연한 노랑과 주황 잎들은 다가오는 가을을 재촉하고 있다. 햇살은 나뭇잎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들어 도서관 안까지 성큼 들어와 있었다. 두 번의 이사를 거치는 동안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호프셀렘은 이곳에서도 싱그럽게 반짝이고 있다. 오랜만에 분주했던 오전을 떠올려 보았다. 시작이 괜찮은 하루였다. 이대로 오늘 하루가 잘 흘러가길 바라는 마음을 조심스레 노트북에 담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