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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 Oct 24. 2024

자화상을 마주하다

내 처지를 알려주는 이웃이 손 내밀 때



거울


"자, 1분만 무조건 웃어 보자."


한 참 웃었다고 느껴지는데 1분은 참 더뎠다. 1초라는 시계 주머니마다 생소한 의지를 가득 채웠던 탓이었다. 플랭크 동작으로 버티는 사람처럼 1초의 흐름마저 인지했다. 모래시계처럼 떨어지는 시간은 이미지 하나를 부각했다.


웃기 위해 웃음을 만들고 공간 속으로 발화했건만, 내 의지 밖으로 날아간 소리는 제 멋대로 진행했다. 늦가을의 차가운 빛처럼 소성(笑聲) 소리가 벽, 천장, 가구, 공간의 틈새로 가닿았다. 포성소리처럼 발화된 웃음소리가 거울에 부딪히자 낯익은 감정으로 다시 변했다. 프리즘을 두 번 통과한 빛과 같이 내게로 다시 돌아왔다. 쏘아 올렸더니 되돌아온 꿈처럼.


낮은 진동수로 울린 웃음소리 때문이리라.

전신 거울에 비친 형상만 뚜렷해졌다. 자화상이 보였고 문득 슬퍼졌다.


거울은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현실을 두드러지게 만들 때가 있다.

여과 없이 드러난 이미지는 덩그러니 혼자였고 웃고 있었다. 실체는 아니지만 또 다른 나였다.  


'웃어 보자'는 의지적 발단을 시도한 경위는 <웃음 효능>에 관한 믿음 때문이었다. <아침 마당>에 출현하셨던 이요셉선생님은 자신의 강의로 나를 설득했다. 예능프로그램도 아니고 다만 <웃음 치료>에 대한 강의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날 밤, 나는 여한 없이 웃었다.


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암진단'을 받았던 환자들도 <웃음 치료>를 통해 암이 낫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었다. 다른 경우도 있다. 이혼을 고민하던 부부가 웃음 치료를 시도했다. 이 과정 수료조차 둘 관계에 별다른 진전이 없다면 그들은 이혼할 예정이었다. 며칠간의 치료세미나를 받았던 부부는 마음을 돌이켰다. 다시 부부로서 사랑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사례만으로 나의 믿음이 생기는 건 무리일 수 있다.


믿음은 나의 경험으로 다져졌다. 그 시기 나는 웃을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 내가 '박장대소'하고 있었다. 체육대회에서 박이 터지는 것 마냥 웃음보가 터져 버렸다. 나뿐만 아니라 강의 시간에 함께 했던 수백 명의 청중 모두 '웃겨 죽겠다'는 반응이었다. 너무 웃다 보면 눈물이 나기도 하는데, 그 웃음은 오장육부까지 웃다가 꼬꾸라질 지경이었다.


"차라리... 하하하... 제발...히히히... 누가 좀...호호호... 아이고...흐흐흐... 멈추게...크크크... 도와주세요. 히히호호... 살려~주세요...아~악~ 제발... 으히히히.. 아이고... 하하하"라는 소리만 터져 나오는 자리였다.


박장대소 짤 & 물개도 박장대소 ^^ ㅋㅋ


한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무해하게 크게 웃었다니? 기적 같은 환희의 밤이었다.

함께 웃어요 :)


생활이 퍽퍽하고 고단했던 어느 밤에 갑자기 이 강의 시간이 떠올랐다. 그때의 권면을 시도라도 해보자는 심산이었다. 매일, 일정 부분의 기쁨을 확보하고 싶었다.


웃음치료사 선생님의 인생이라고 마냥 기쁘고, 웃을 일만 가득할까? 그분이야 말로 반대적인 상황이 많겠지만 웃기 위해 훈련한다고 하셨다. 웃는 일도 훈련이 가능하다.


게다가 두뇌는 진짜 기뻐서 웃는 것인지, 의지적으로 노력해서 웃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 자연스러운 웃음이던 의지적인 웃음이던 두뇌는 웃음에 관한 호르몬을 무조건 생성한다. 좋은 호르몬 때문에 잇달아 얻어지는 효과는 신체의 건강 외에도 더 많을 것이다.   


나는 선생님의 강의를 접하기 전에도 웃음과 행복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달라이 라마 공동체에서 수양하는 스님들의 묵상 훈련 이야기를 책에서 접했기 때문이었다. 그 공동체의 한 스님은 '기쁜 감정'을 몇 년에 걸쳐 끊임없이 묵상하셨다. 그분 곁에 다가가는 사람 누구나 자신도 모르게 '기쁨'을 전이받는다고 했다. 그 스님은 묵상 훈련을 통해 '기쁨'을 정통하셨다는 확신이 들었고 이 사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연습해서 증폭할 수 있는 기쁨이라면 얼마나 공평한 전제인가?

공평하게 연습해서 기쁨을 끌어오려 했건만, 거기에 거울이 있었다.


홀로라는 상황이 거울에 비쳤고 1분이나 걸리는 훈련 시도는 보잘것 없어졌다.

시도하기 전보다 훨씬 슬퍼졌으니까. 거울의 잘못은 아니지만 거울 때문이었다.

거울의 존재 의미는 특별하다(unique). 특히 현대 지구인들에게는.

내가 좋아하는 시이면서 이런 상황에 어울리는 시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의 자화상>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이쾌대


메타인지는 둔하지만,


요즘 유행하는 인식론 중 '메타인지'라는 말처럼 흥미로운 말이 있나 싶다. 자기 객관화라는 정의를 포함한 의미인데 나에게는 여전히 재해석의 여지가 많은 용어다.


나는 메타인지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서일 수 있다. 성장 과정에서 받았던 영향이 일부 있을 테고, 나의 기본 성향 때문이다. 순간 집중력이 뛰어나고 성과에 대한 집념을 가졌다. 두 가지가 결합된 상황 예를 들어, 대중 앞에서 퍼포먼스를 선보인다거나, 중요한 시험을 치를 때, 나는 오히려 성과가 굉장히 높아진다. 평상시 연습 때 보던 모습이 아니라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만들 때가 있다. 그 결과는 나 자신의 예측에서도 빗나가는 것이다.


내 안에서 나오는 실력이라 보기에는 평상시 실력에 비해 150%의 에너지가 몰입되어 나오는 결과라 짐작한다. 단점은 동일한 성과를 다음번에 또 만들어 낸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 집중력이 떨어지는 반대의 상황은 참담하다. 이런 유형의 사람인지라 나에게는 '메타인지'는 어려운 숙제다.

 

나를 인지하는 능력은 '거울'의 역할을 해주는 상대와의 만남을 통해 효과적으로 이뤄진다.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사람과 서로 좋아서 관계를 갖는 것인데, 이 좋은 관계가 나 자신을 회복시킨다? 교훈을 주기도 하고 결국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슬퍼져도 돌아가 버린 후 아예 멀어질 수 없는 사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영원히 함께 존재할 '나를 그리워하고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다.




하리언니는 그날도 나를 찾아왔다. 연아*가 자신의 베프라며 하리언니를 소개해 줄 때 둘은 서로를 매우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내 앞에서 연아는 하리언니를 하리언니는 연아를 자랑스럽게 칭찬했다. 그 둘 관계 사이의 여백이 있을 거라 짐작도 못했다. 


여백은 우연처럼 다가오는 인연으로 생겨났다. 나는 하리언니와 자주 마주쳤다.  

연아, 하리 그리고 허니 우리 셋은 무엇 하나 서로 닮은 게 별로 없었다.


연아는 하관이 발달된 얼굴형에 성격만큼이나 이미지 선이 뚜렷했다. 서구의 사회에서 섹시한 이미지로 보일 외모였다. 연아의 비교우위의 대상은 친구들이 아니었고 친언니였다. 언니가 이대를 졸업하면서 아나운서 준비를 했다. 얼굴 이미지가 매우 다른 언니를 보면서 자란 연아는 어린 시기에는 열등감을 느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쌓인 실력과 자기만족을 통해 넘어선 사람이 20대 연아였다. 용돈도 스스로 벌었다.


하리언니는 베프 연아의 장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연아 앞에서는 하리언니의 연약함을 드러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외적 분위기와 얼굴생김새를 설명하자면 하리언니도 나와는 달랐다. 하리언니는 동서양의 아름다움이 오묘하게 섞여 있었다. 한국에는 흔하지 않지만 이스탄불에서 자주 마주칠 수 있는 외모였다. 집은 잠실에 위치해 있었는데, 학구열 높은 부모님은 사회적 지위 또한 높은 분들이셨다. 잠실에 살아보질 않아서 잠실의 분위기를 알 수 없지만 대학 입학 이후로 '잠실동네의 착한 아이'로서는 더 이상 살지 않겠다고 작정한 하리언니였다. 그 여파로 가족 다니는 교회부터 혼자 끊었다. 1학년 2학년동안 클럽을 주로 다니고 쫓아다니던 남자 친구들과의 교제에 집중했다.  


그에 비해, 내가 중국 상해를 여행하면 생기는 일이다. 상해도시를 갓 방문하거나 여행중인 중국 현지인들이 자꾸 나에게 다가왔다. 상해도시 내 부의 상세한 길을 물어보거나 상해에 관한 다른 안내를 받고 싶은 모양이었다. 중국말로 숄라숄라말을 거는데 "워스 한구어런"이라 말하면 놀라는 눈치였다. 박물관이나 공공시설 방문할 때도 하리언니로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나에게는 생겼다. 중국은 공공기관 출입할 때도 국제공항에서처럼 두 종류의 줄을 세우곤 했다. 나는 한국사람이니까 외국인 줄에 서 있었다. 관리자는 나에게 줄을 잘 못 섰다면서 바로 옆 줄, 국내사람(중국사람) 줄에 세웠다. 입장표를 제출하고 들어갈 시간이면 비로소 외국인 줄로 다시 보내야 하는 걸 알고 미안해했다.


동남아의 다른 도시를 여행할 때는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으로 변했다. 대부분 나를 '일본 사람'으로 보았고 나는 이점이 속상했다. '코리아'가 세계 속에 대세인 요즘에, "한국 사람 같아요"라는 말은 '정말 미인이에요'라는 말로 들리니까. 나를 보고 일본 사람 같다던 외국 친구가 나와 5분 정도 대화를 나누고 난 후에는 때늦은 말을 건넸다. "You're a Korean." 의미는 '너 한국 사람 맞는데. 내면과 태도는 한국사람 맞아'라는 것이었다.


나의 외모도 한국적이지(?) 않은 모양이지만 동양적인 건 확실했다.


나에게만 비밀을 털어놓고 싶다던 하리언니의 표정이 유난히 슬퍼 보였다. 속내를 다 꺼내기도 전이었다. 언니의 눈가가 촉촉해지더니 물줄기부터 터졌다. 흐르는 눈물사이로 말을 이었다.


언니의 고백이 나에게 구원의 밧줄이 될 줄은 몰랐지만 언니가 내 앞에 앉아 있는 의미는 알 것 같았다. 서로의 시야를 채운 공백사이로 '거울'이라는 독특한 물질이 존재했다.  


"허니야 내가 요즘 사로잡힌 생각이 뭔 줄 알아? 자살이야.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떠나지 않아."


언니의 문제는 나의 문제였다. 터널에 들어가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처럼 6개월 동안 휩싸였던 그 우울한 생각이었다. 다행히 사후세계의 원리를 찾겠다며 생각의 방향을 바꿨고 덕분에 약간은 차분해졌는데 그 주제가 수면에 다시 떠올라왔다.


'드디어 같이 죽을 사람을 찾았다.'라며 반가워할 수 있는 상황인데 나의 반응은 달랐다.

언니의 갈등에 수긍하기 위해 눈을 맞추었다. 언니가 계속 말하도록 한참 동안 그대로 두었다.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거울에 비친 형상의 역할이 나였다면 언니는 실체였다. 자살에 관한 내 생각, 내 경험은 조금도 꺼내지 않았다. 묵혀둔 이유는 지금도 모르겠다.


"그랬구나 언니~ 힘들겠네."

나의 눈빛은 거울 앞에 서서 혼자 웃으려다 말고 슬퍼진 그 눈이었을 것이다.  


"그래 허니야. 연아한테는 말 꺼낼 엄두가 안나.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 같아. 가진 게 많은 내가 깝치고 있다고 생각할까 봐 두려워. 이상하지만 너에게는 얘기해도 될 것 같았어. 내 주변에서 이 말을 꺼낼 수 있는 사람은 너와 친동생 둘이야."


"언니가 나 또한 우울한 시간이 많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럴 거야. 섭식장애도 비슷하게 겪었고 말이야."


혈관 주사를 맞을 때나 찾아지는 혈관처럼 '생명본능'이 불쑥 나타났다.

"얼마 전에 나카타니 아키히로 <20대에 하지 않으면 안 될 50가지> 책을 읽었거든. 내게 50가지는 너무 많아서 20가지만 기록해 뒀어. 자 이거 봐봐."


나의 다이어리를 꺼내 목록 페이지를 펼쳐 보여주었다.


<20대에 하지 않으면 안 될 허니의 20가지>

1. 새벽에 일어나서 운동하기 (정말 스쿼시를 하려고 새벽 5시 6시 사이에 일어나서 1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가서 운동했다)

2. 책 읽기

3. 적금 통장 만들어서 일정 금액 저금하기

4. 일기 쓰기

5. 감사 목록 3개 이상 매일 찾기

....

18. 편지 쓰기

19. 성경책 읽어 보기

20. 교회에 나가 보기


다이어리 :)


"허니야 나 너무 소름 돋아. 내 마음하고 너무 통하네. 나 지난주 내내 너에게 얘기할까 말까 망설이고만 있었거든. 괜히 얘기 꺼냈다가 요즘 들어 마음 통하는 친구로 만나는 유일한 존재를 잃게 될까 봐 말도 못 했어."

"어 그래? ㅎㅎ 그럼 언니만의 목록도 만들어 봐. 그럼 되지?"

"여기 19번과 20번 너랑 같이 해보고 싶었거든요."


'뭐라고? 이게 왜 여기 있어? 이 목록 내가 적은 것 맞아? 으이구 난처한데... 왜 내 기억에는 없지? 19번과 20번 목록 진짜 내가 적은 거 맞아? 어째, 오늘 난생처음 보는 느낌?'


"어...? 응..."

"너랑 같이 가고 싶은 교회가 있어. 가족들이 다니는 잠실에 있는 교회는 아니야. 이촌동에 있는 찬양이 좋은 교회야. 같이 가보자."

"아~ 하. 응~"


며칠 후에 알게 된 사실은 하리언니가 같이 가자던 교회가 나연*이의 어머니가 소개해주신 교회와 동일했다. '이건 무슨 반복이 계속되는지, 원!'


게다가 언니에게 희망을 주겠다며 보여준 목록이었다.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기록해 둔 필체였고. 더군다나 죽음을 생각하는 하리언니의 탈출을 도와줄 역할이 바로 나여야 했다.



양 진영의 싸움


신기한 건 '죽음'도 6개월 정도 간절히 원했기에 이것 또한 바람이라면 바람이었다. 바울로 코넬료는 <연금술사>에서 누군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간절히 갈망하면 온 우주가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함께 돕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지구와 온 우주 시스템은 이런 종류의 성취 즉 '나의 죽음'도 이뤄지기를 함께 원했을까?


지구와 온 우주 시스템은 생명 본위적 지향점을 가지는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죽음'을 허용한다는게 나의 의견이다. 생명과 죽음의 영역은 각 자의 힘이 있다. 둘 중 어느 진영의 힘이 더 강할까?


어떤 간절한 바람이나 목적이던지 생명 지향적인 힘과 죽음 지향적인 힘이 함께 작용할 수 있다. 간절히 원하는 방향이 생명 지향적일 때 생명의 힘 원천은 그 갈망을 '소원'이라 승인할 것이다.


죽음 지향적인 바람도 있을 수 있다. 예로, 히틀러다. 그는 전 세계에 엄청난 비극과 고통을 만든 갈망을 가졌다. 하지만 이를 '소망'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건 잔인하고 끔찍한 악마적인 범죄였다. 이렇게 죽음 지향적인 갈망을 가졌던 히틀러의 영혼에게도 양 진영의 힘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물론 생명지향적 힘을 계속 거부했겠지만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무척 감사한 점을 발견한다.

내가 죽음을 갈망할 때, 생명지향적 진영의 힘이 나를 그대로 버려 두지 않았던 것이다. 나의 단점이자 최강의 장점 '생각하는 기능'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도왔고, 계속된 회유와 설득으로 인도했다고 여긴다.


영혼이나 마음이 병든 사람은 육체가 아프고 괴로운 사람처럼 외부의 도움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회복을 향한 자신의 열망과 의지도 중요하지만 외부의 도움과 인도가 분명한 힘으로 작용될 때 회복의 힘은 강력해진다.


지구 안에서 우리의 죄성과 신성 사이의 싸움은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계속되고 있다.


내적 외적 전쟁을 잘 표현해주는 애니메이션 :)


그렇다면 지구밖에서 중력이 작용되지 않는 영역에는 어떤 힘이 지배적일까? 화성을 향해 꿈을 갖는 지구인들의 꿈과 도전은 이뤄질 수 있다. 내가 믿는 신의 성품은 그렇게 크고 관대하다.


첫 번째 삶의 기반이었던 '지구'를 망할 것처럼 사용했다 한들, 화성 착륙과 콜로니가 성공한다면 그것도 허용할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고 용납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나의 믿음이다. 본질이 인류의 믿음 때문에 바뀔 수는 없다. 비본질인 천동설을 믿고 주장해도 본질이었던 지동설로 우주는 자신의 일을 계속 해낸다. 신의 시각과 계획을 우주 안에서 먼지 같은 나의 존재가 다 이해할 수는 없다. 내 믿음과 계획과 상관없이 거대하고 큰 역사가 흐르듯 우리의 신도 그분만의 계획을 진행하시겠지만 말이다.




다이어리를 펼쳐 보여준 시간과 기록된 목록을 작성한 시간과는 몇 개월이라는 간극이 존재했다. 그 사이 19번 20번 위시리스트에 대한 기억은 사라져 버렸다. 기억을 새롭게 떠올려준 하리 언니와 나의 새로운 미션사이에 어떤 연결 고리가 생길 것 같지 않은가?


스스로에게 새롭게 부과한 미션 중 ‘사후 세계의 원리나 법칙’ 알아가는 것이 첫 번째였다. 두 번째는 작은 일이라도 '사회적 봉사'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연아: 연재 5화 <내 아들을 딸로 바꿨다>에 등장하는 나의 룸메이트
*나연: 연재 15화 <낯선 초대가 계속되는데~>에 등장하는 나의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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