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니 Oct 31. 2024

되돌아갈 곳이 있었던가?

귀환



초보의 느림은 안전 보장이건만,


'되돌아갈 곳이 있었던가?'


세상 어디에도 고향이 없어진 느낌이었다. 고향집은 가장 깊은 안식처였는데 말이다.

아팠던 건 내 마음인데 고향이 사라져 버렸다고? 그곳에 찾아갔지만 이전과는 달라진 마음 때문이었다.


몸이 아플 때를 생각해 보면 쉽게 설득된다. 다리를 다쳐 깁스라도 하게 되면 아무렇지 않게 오르내리던 계단이 낯설어진다. 앉고 일어서고 눕는 일 하나하나가 큰 과업으로 변해 버린다. 일상의 공간들이 불편한 곳으로 재설정된다. 모든 장소가 불편하고 낯설다 보니, 어딜 가도 이방인처럼 느껴질 것이다.  


사업을 한다며 학원을 열었는데 코로나가 심하게 찾아왔다.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매일 쌓였고 동업자였던 남동생, 잇따라 올케 그리고 수학과목 대표 강사(남동생의 선배)와 의견 충돌이 잦았다. 시작부터 학원생이 초등1학년이자 친조카, 아현이 한 명이었고 이 상태는 3개월간 지속됐다.


세상을 휩쓸었던 '코비드 19'의 배경 설정이 첫 개인사업과 유착관계를 맺었다. 접착제처럼 끈적거리는 이 인연이 1년 7개월가량의 시간을 꼬박 채우며, 하루에도 열두 번씩 나의 마음을 흔들어 댔다. 사업을 통해 '마음훈련(mindfulness)'의 기초부터 다져야 했다.


서서히 벚꽃이 피었고 공기도 따스하게 바뀌었다. 제발 사라지기만 바라던 매서운 코로나의 영향력도 봄바람 따라 하늘거리더니 결국 느슨해졌다.


사업 성과를 향한 열정이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전에 받던 월급 정도의 수입을 간신히 벌자며 자영업을 시작한 건 아니었으니까. 열정과 비례해서 욕심도 커졌다. 욕심은 초조함을 만들기 마련이다.


아직 어둑한 하늘이던, 해가 막 떠오르는 일출시간이던 상관없이, 눈뜨자마자 밖으로 나갔다. 복잡해진 마음을 생글거리는 에너지로 바꿔주는 아침 루틴을 위해서였다. 달리거나 아니면 동네를 속속들이 뒤지듯 걸었다.


일터로 출근하면 다시 마음에 집중했다. 사업 경력 초보는 초보대표답게 매일 '마음 다잡기'만 했을 뿐인데, 일이 끝나면 파김치처럼 노곤노곤해졌다. 아침에 굳건히 다잡은 마음이 어김없이 나약해져 있었다.


별 수 없었다.

벽에 걸린 바늘 시계처럼 하루의 루틴을 반복하면 될 일이었다. 사업 초보자의 삶이었다. 주가의 최저가의 정점을 찍는 것처럼 '마음훈련'의 꼭짓점은 아직 찍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버티고 있던 나에게 사고 하나가 추가되었다.


5km 정도 떨어진 장소로 이동해야 했는데, 대중교통은 답답하게 느껴졌다. 동탄 신도시의 대중교통은 서울 대중교통 시스템을 따라갈 수 없다. 도시가 아니라 시골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느렸고 불편했다. 택시조차 별로 없었다.


대안으로 '전동킥보드'를 시도했고 혼자 연습한 지 30분 만에 터득했다. 5km 거리라면? 킥보드로는 10-15분이면 이동 가능했다. 느리고 안전한 대중교통 시스템 때문에 기분이 착잡해지느니 재미까지 넘치는 이동 수단 '킥보드'를 선택했다.


나는 스키나 스노보드처럼 바람을 느끼는 액티비티를 좋아한다. 자연 속에서 속도감을 느끼다 보면 신난다. 바람과 함께 자연의 일부가 되어가는 감각적 즐거움은 다른 어떤 감동으로도 대신하기 힘들다. 3분 안에 마음이 신나지는 액티비티가 킥보드였다.


도착하면 만나게 될 이웃과의 약속 때문에 정장도 말쑥하게 입은 채로 달리고 있었다. 자세한 얘기는 안 해 주셨는데 '소개팅'을 주선하실 분위기였다. 이건 그분의 관심이었고 나는 오직 사업뿐이었다. 동탄 카림상가에서부터 타기 시작했고 창의고 앞을 통과하기 위해 비탈을 오르고 있었다.


전동 킥보드 타고 출근 시작 ~ ^^


"쌩~"

달리는 킥보드를 타면서 머리에는 욕망을, 마음에는 교만과 허영심을 채웠다. 나 자신을 설득하고 스스로에게 인정받기 위해 허영과 허세에 빠져드는 미련함이라니! 동시에 사업 성과로는 언제 받게 될지 모를, 더디게 다가오는, 보상대신에 '위험한 도파민'을 생성 중이었다.


사업을 빠르게 성장시키고 싶은데 뜻대로는 안 되고, 사업적 관계도 마음대로 안 풀리는 동탄, 새로운 교육 시장 동탄이라는 도시가 나에게는 온 우주에서 가장 외롭고 추운 시베리아 같았다. 동업자와 그들이 미웠다. 얽힌 생각들이 나의 허세와 허영을 더욱 부추겼다.


킥보드의 속도를 줄여야 할 경사진 오름길임에도 불구하고 평지에서의 속도를 유지했다.


"퍽!"

오기가 정수리까지 차 올랐던, 자만심은 어깨에 둘러메었던, 나는 꼬구라졌다. 피가 나진 않았지만 코뼈에 금이 갔다. 피가 솟구치는 곳은 왼쪽 무릎 부근이었다. 세미 정장 바지는 손바닥만 한 구멍을 내고 찢어졌다. 좋아했던 옷인데 버려야 했다. 걸을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일단 너무 아팠다.  


땅바닥이 얼음판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전화를 걸고 다른 누군가를 찾을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냉정한 바닥에서 느리게 일어났고 조치를 취해야 했다.  


가족들이나 119를 찾지 않았다. 가족들은 "119라도 부르라"라고 이미 알려주었다. 킥보드 사고가 발생하기 몇 개월 전에도 다른 사고가 있었다. 그때는 '자전거'를 시청역에서 탔는데 청계광장에 쓰러져 있었다. 자전거 사고를 회복하고 그로부터 5개월 정도 지난 후였다.


길바닥에 또 쓰러져 있었다. 못나고 복잡한 심정이 만들어낸 사고였다. 사고 처리를 위해 병원에 도착했다. 택시 기사뿐 아니라 대부분의 지인들도 이런 상황에 대한 반응이 비슷하면서도 디테일은 제 각각이었다.


사고는 이미 발생한 상황인데 대개 과거 지향적이다. 한국 스타일일까? 유머보다는 평가서나 기사를 쓰는 사람들처럼 반응했다. 게다가 매우 감정적이었다. 화가 나고 안타까운지 내 탓을 하면서 나무랐다.  


나에게 좋은 방법은? 곁에서 마음이 따스해지도록 도와주면 좋다. 너무 놀랜 마음을 안아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안아주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나를 웃겨 주는 것이다. 재밌는 얘기 하면서 같이 웃으면 좋겠는데 피 철철 흐르고 뼈가 부러진 상황에서 함께 웃어 주는 이웃이 흔치 않다. 이런 사고 발생 시 알리지 않고 혼자 수습하는 이유다. 수습하고 나서 간략하게 알리긴 한다. 그런데 정황상 이번 사고는 소문이 번졌다.


< 쾌활한 중년 여성 킥보드 타다. 지금은 왼 발에 깁스 하고, 코 부위는 5cm 정도 찢어져 코에 반창고를 붙이다. 피를 흘리는 코뼈 수술을 진행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수술 이후 코의 생김새는 이전과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 지역 신문이 있다면 위의 기사가 나갈 정도로 이웃들에게 알려졌다.


곧이어 학원 생의 30~40%가 우르르 퇴원했다.


발에는 깁스를 하고 코뼈는 수술을 진행하는 동안 친숙해지려고 노력했던 환경이 다시 변해 버렸다.   

동탄은 북극보다 낯선 도시였고 어디로든 떠나고 싶을 뿐이었다. 물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위로해 주는 이웃도 계셨다. 우리는 통화하거나 만나면 함께 웃고 농담하고 더 좋은 날들을 기대했다.


깁스한 강아지의 고민과 도전은? ^^;;


귀환


과연  마음이 아픈 것과 육체에 피가 흐르고 뼈가 부러진 것과 다를까?


마음과 정신이 아플 때도 동일하다. 심각하게 아파 보긴 20대 때가 처음이라 똑같은 병이고 고통이라는 걸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서울에서 지쳐버린 마음은 고향 집에 가서도 휴식을 얻지 못했다. 오히려 나른함까지 들러붙는 장소가 고향이 되어 버렸다.  


스스로의 삶에 대한 애착과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영혼은 어딜 가도 '이방인'과 같은 고립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방랑자, 노마드, 디아스포라와 같은 의미를 이해했더라면... 세상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다며 위로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개념자체를 몰랐다.


영혼이 지치고 목마른 자에게 귀환은 아리고 안타까운 단어다. 동시에 희망적이다.

'귀환'이라는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마지막 성냥에 불빛을 태우는 성냥팔이 소녀의 애잔하지만 환한 소망이 있다. 2017년 출간된 이후 전 세계적으로 평단과 대중 모두를 사로잡은 소설 <파친코>에서 긴 고난 끝에, 주인공 선자가 고향에 돌아오는 장면이 있다. 자유를 끝없이 갈망하던 빠삐용이 감옥에서 탈출하여 돌아가고 싶었던 곳, 그리웠던 곳도 집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언제고 '귀환'할 장소가 있다는 의미는 꺼지지 않는 희망을 품고 사는 것이다. 모진 가난도, 역사가운데 겪은 비인간적 학대도, 인생을 허무하게 만들어 버린 억울한 누명도 반드시 이겨낼 희망이다. 귀환하는 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장애물도 새로운 간절함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돌아갈 곳은 어디인가?


하리언니를 통해 깨달았다. 귀환의 온전성은 장소의 의미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관계의 회복으로 완성되어져 가는 진리임을 알게 되었다.


당신이 떠나온 곳에서 당신을 끊임없이 기다리는 관계의 대상을 상상해 보라. 연락이 끊어진 채 세월이 흘러 버려서 확인할 바 없지만, 그래도 기다림을 포기할 수는 없는 대상을.  


렘브란트 반 리인의 <탕자의 귀환>이라는 그림을 보면 되돌아온 아들과 기다림을 성취한 아버지에 대한 스토리가 있다. 화가의 붓터치가 사연 많은 둘 관계사이로 넘실 거리는 슬픔과 환희의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간절히 기다리던 아버지의 애환과 소원의 성취가 배어있다. 아버지 생전에 유산으로 요구한 돈은 탕진하고 온갖 고생을 하다, 거지꼴로 되돌아 온 아들이 있다. 아들의 마음을 껴안는 아버지의 슬픔은 차라리 신비한 빛처럼 찬란하다.  


렘브란트 <탕자의 귀환>


자녀를 기르다 복잡한 장소에서 잠깐 손을 놓친 후, 반나절만에 찾아본 경험이 있는 부모라면 이런 심정을 알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의 시간은 잔혹하다.  


하리언니는 몇 주 더 기다려야 했다. 결국 언니가 바라던 이촌동 교회로 나를 데리고 왔고 우리는 함께 앉았다.


내가 현혹되었던 점은 외형들이었다. 무엇보다, 이촌동이라는 동네가 아늑하게 느껴졌다. 아늑한 동네 깊은 곳에 위치한 교회였다.


2주 전에 동아리 친구, 소희가 '베스킨라빈스 이촌동점'에서 알바를 한다 해서, 나와 친구들이 이촌동을 처음으로 찾아갔다. 우리는 각자 파인트 사이즈 한 통을 들고 먹어야 직성이 풀릴 만큼 아이스크림을 좋아했다. 그날도 알바생 소희의 팁을 따라 아이스크림 뷔페에 온 사람들처럼 달콤한 것을 잔뜩 먹었다. 아이스크림 때문에 호감도 덩달아 커진 동네였다. 교회에 도착해 보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세련되고 우아한 유럽풍 건물이었다.


베스킨라빈스 & 아이스크림


좋았던 이미지와 그 시간이 떠올랐다.

대학 3학년 시절 학교로부터 장학금 명목으로 후원을 받으면서 '미국서부 견문'을 갔는데, 일정 중에 스탠포드 대학교 방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스탠포드 대학교 정경은 자연과 조화를 잘 이루었고 우아하고 신비로웠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신들이 거주할 것같이 느껴졌다. 천상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 같았다.


교정이라고 하기에는 국립공원 같은 캠퍼스였다. 도서관 건물이라기보다는 박물관이나 미술관 같았다.


스탠포드에서의 감정들이 이촌동에 위치한 아름다운 교회 건물을 보자 유사하게 생겼다. 로비층에는 "샤이닝 글로리 레스토랑"이 있었고, 본당이라는 장소는 천장이 매우 높아 웅장했다. 빛이 들어오는 구조의 섬세함덕분에 조명이 고즈넉하고 아늑했다. 두 건물이 서로의 2층에 위치한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두 건물은 각 자의 특색을 잘 갖췄다. 분리시켜 둔 공간이었지만, 연결점이 된 다리였다.


두 번째 건물 1층은 통창이 잘 둘러져 있어서 그곳에 들어서는 사람마다 상쾌하고 시원한 기분을 언제든 느낄 수 있었다. 그곳은 카페였다. 사람들이 각 장소가 제공하는 아름다운 감정, 편안한 마음, 정겹고 밝은 기분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설계된 장소였다.


어떤 장소든 그 장소가 갖는 독특한 색깔, 감성, 에너지가 있다. 이촌동과 이촌동에 위치해서 방문했던 그 교회의 이미지가 정말 의심 많았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알고 보면 직접적인 연관이 전혀 없는 '이단교회'의 이미지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예배당의 구조도 '예술의 전당'의 공연장이 생각났는데, 2층이 열린 구조로 설계되었다. 연극을 좋아해서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되는 연극을 종종 관람했다. 때문에 이런 구조의 설계가 친숙한데다 좋았다. 하리언니와 나는 2층(본래는 3층, 기본층이 로비임)의 앞 쪽 줄에 나란히 앉았다.


예술의 전당 공연장


우리 둘의 상황과 입장은 달랐다. 하리언니는 '신'과의 관계가 익숙했으나 몇 년간 스스로 단절한 상태였다.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는 언니였다면 나는 관계라고는 가져본 적이 없는 '신'을 허공에서 찾거나 기다려야 했다. 정체성은 우울증 걸린 천사였다. 하리 언니가 나를 '천사'라고 불렀다.


나도 어린 시절 교회를 접해 본 경험이 있었다. 그때의 교회와 이촌동 교회는 딴판이었다. 판소리 음악을 접해 봤다가, 모던 클래식 음악을 들으려는 시도처럼 둘의 경험적 차이는 크게 다가왔다.


교회 건물뿐 아니었다. 계속해서 무엇이든 외형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들은 모두 충격적인 감동과 호기심을 발생시켰다.


찬양 시간이라지만 관련된 음악을 잘 모르니까 음악회를 관람하는 기분으로 그저 듣기만 했다. 콘트라 베이스까지 완비된 관현악단의 연주 소리는 조화롭고 훌륭했다.


그러다 한 분이 강대상에 올라오는 장면을 보고 놀란 눈이 더욱 커졌다. 스모선수 같은 체격을 하신 한 남성분이 정장을 단정히 입은 채 올라오셨다. 노래(찬양)를 부르셨는데 그 소리는 천상의 소리였다. 비범한 체구로서 발성할 수 있는 천상의 웅장하고 힘있는 소리에만 빠져들고 싶었지만 수준미달이었다. 외모지상주의에 빠져 있던 나는 그 놀라운 음악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다음 차례가 진행되었는데 거기서도 외모에 눈이 팔렸다.


그날의 설교자의 외모였다. '왜 하필 2층에 앉았는지...'

부끄럽지만 말씀을 듣는 내내 고민이 깊어졌다.

'저분은 유대인처럼 머리에 키파를 쓰신 걸까? 실제 두상으로, 독발(禿髮)이 시작되신 걸까?'


신기한 건 그 와중에도 '말씀'이 마음을 두드렸다.

모든 문장에 공감이 계속되다 보니, 야광펜을 내려놓을 수 없는 책 한 권을 만난 기분이었다.


'맞네.'

'아 그래. 맞아.'

'아 그래서 그런 거구나.'

'그거였어. 우아 그런가 보네.'


지루하거나 졸릴 틈은 없었다. 쉬운 문장으로 잘 알려진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톨스토이의 문장을 만난 격이었다. 너무 쉽고 단순한데 분명하고 힘있는 문장들이었다. 목소리로 전달되는 문장의 깊이는 어떤 이의 굴곡진 인생이라도 송두리째 품을 수 있는 바다와 같았다.


심연 같은 지혜를 9살 친구도 알아들을 만한 언어로 쉽게 풀어지는 소리에 마음을 홀딱 뺏겨 가는데, 다시 집중력이 흐려졌다.  


하리언니 얼굴이 콧물과 눈물로 뒤범벅이었다. 눈물을 폭포수처럼 콸콸 쏟아내며 소리 내어 울었다.


귀환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나에게 언니의 반응은 '당황'자체였다. 도와줄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언니를 돕고자 동행했던 자리였고, 간 김에 <사후 세계에 대한 궁금증의 실마리>도 풀어보자는 의도였다. 언니가 나를 '천사'로 불렀기에 천사처럼 반응해야 했고 말이다.


"허니야 너는 천사야. 내 동생도 네 얘기를 들려주면 너는 신(하나님)께서 내게 보내주신 천사래."

'내가? 그런가? 천사라고 하기에는 꽤나 우울하고, 돈도 좋아하고, 놰쇄적이긴 하지만, 일단 언니를 도와야 하니까. 그냥 아무 반박은 안 할게.'


천사라면 그렇게 주체 없이 울고 있는 언니를 달래줄 법도 한데, 나는 당황한 나머지 방관했다. 어색한 내 기분을 정돈하는 데만 마음을 썼다. 말씀 전파자의 '두상 모습이 모자인지 인체현상인지'가 다시 궁금해졌다.


큰 울음 덕분에 카타르시스를 느낀 하리언니였던지 다음 주에도 같이 오자했다.

언니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곳에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호기심이 깊어졌다.


'근데 여기 오니까 왜지? 집에 온 것 같아. 그런 포근함이 있어. 이곳에 오다 보면 내가 찾던 것을 찾을 수 있을 거 같아. 따뜻했어. 순수한 어린 시절에 소풍가는 날에나 느끼는 그런 설레임일거야. 언니는 왜 울었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게 다행이야.'



스탠포드 대학 정경






이전 16화 자화상을 마주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