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영업자 생존 >노트_00710
상황만 봐서는 '좋은 일'은 아니다. 좋게 해석하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회사 소속이 아닌 자영업자로 운영하는 학원에서 영어 쪽 학생들이 지난달부터 한 두 명씩 줄고 있다. 다음 전화가 울렸다. 정국 어머님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남학생이다. 나와 공부를 시작한 시기는 그 아이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영어를 매우 싫어하고 수학만 좋아하는 친구였다. 나와 공부 시작하고 바로 첫 시험에서 영어 100점을 맞았다. 정국이의 가장 큰 문제는 '기흉'이라는 병이었다. 코로나 시즌에 기흉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1-2달 동안의 초조한 시간을 버티다 수술을 진행했다. 학교의 결석이 잦았지만 계속 진행했다.
정국이를 만날 시기 초반에 나는 '강남스타일 티칭'을 버리지 않았다. 강사 일을 처음 시작한 동네가 다름 아닌 '압구정'이었으니까. 압구정, 서초, 대치, 반포 지역 등 주로 서울에서도 교육열이 높은 지역에서 나만의 티칭법을 개발했다. 티칭법의 성과를 위해 고민했다. 학부모님이 원하는 '학생의 성적 향상' 결과를 가져오는 방법이 무엇일까? 단기적으로 성과를 내는 방법은? 나만의 강사법으로 적당한 방법은 무엇일까? 모든 창조는 자기 다운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나의 아버지가 나를 교육시켰던 방법이 익숙했다. 기억 속에 흔적이 크게 남은 방법이거니와 성공 사례가 바로 나였다. 세월을 지나 동탄 지역까지 와 보니 성공 사례라고 확신하기 주저하게 된다. 성공의 정의가 많이 달라지고 있어서다.
초기의 그 방법은 성적은 단기적으로 빨리 올릴 수 있다. 반면에, 좋은 관계를 형성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관계가 아닌 성적 성취라는 목적에 중심을 두는 방법이니까. 압구정에서 강사를 처음 시작하고 3년 정도 울면서 출근했다. 동네가 동네이니 만큼 학부모님들 또한 아버지처럼 성공지향적이고 목적주의적인 분들이 많았다. 어떤 분은 아버지보다 더했으면 더했다. 결과적으로 내가 선택하고 개발하려던 티칭법이 통하는 동네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시기적으로 경력 초반에 가르쳤던 학생들은 이미 다들 성인이 되었다. 대학교는 이미 졸업했을 테고. 대부분 유학 가서 공부를 길게 하거나 직장인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강사 경력이 꽤 되었다.
압구정에서 시작해서 그 지역에서 먹혀든 나만의 티칭법? '언닌 강남스타일'은 굉장히 카리스마 넘치는 방법이었다. 어떤 학생이든 2-3개월 지나면 20-30점 정도의 점수가 올렸다. 나의 카리스마가 매우 무서운 기운이었으니까. 오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종류의 두려움을 발산했다. 이 티칭법은 쎈 동네에서 쎈 엄빠님의 가정에서 자라 그런지 덩달아 쎈 학생들에게 통했다.
강남권에서 10년 넘게 경력을 쌓는 동안 나의 카리스마도 더불어 강해졌다. 자기 자녀 한 명의 학습 방법을 위해 학원 전체 시스템을 뒤집어엎는 고객도 있다. 그런 고객이자 어머님과 상담 중에 가끔 싸울 일도 생겼다. 처음 강사 시작할 때 출근 전까지 울다가 출근하던 여리고 순하던 '나'는 온 데 간데 없어졌다. 싸워서 지지 않는 '강남 강사'에 걸맞는 '나'로 변했다. 여기서도 나의 삶의 철학 중 하나의 원칙은 들어맞는다. "좋은 게 다 좋은 게 아니고 안 좋은 게 다 안 좋은 것은 아니다." 성적이 빠르게 오르는 게 다 좋은 일일까? 내 성격이 변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러다 자영업자로 학원을 오픈한 동네는 동탄이었다.
새로운 도시에서 다시 새롭게 인생의 '도'를 닦고 있다.
달리 말해 '길'을 만들고 있다.
나와 타인들을 위한 좋은 인생길
고객층이 달라지자 만나는 학생들의 성향이 완전히 바뀌어졌다. 동시에 나도 바뀌어야만 했다. 이 지역에서 만난 '알파 세대'에게 '카리스마'가 통할 것인가? 내가 만나는 학생들의 성장 과정이나 부모님의 성향에 맞게 나를 바꾸지 않으면 나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경력은 쌓여 가는데 매 해 학생들이 달라진다. 같은 학생이 매일 등원한다 해도, 그 학생의 컨디션과 개인 상황은 매일 달라진다. 쉽지 않다. 크게 4분기 따라 시즌이 있다. 중간고사 2번, 기말고사 2번 추가로 방학 시즌 2번씩 있다. 이때마다 고객들의 이동에 나의 반응하는 마음을 다지는 중이다.
아침에 통화했던 정국 학생의 경과는 정국이가 기흉으로 병원을 들락날락 거릴 때부터 시작이었다. 이번에 부모님이 공부에 대한 욕심을 완전히 내려놓는 기회로 만들고 싶어 하셨다. 진심이 보였다. 중간 기말을 거치는 동안 영어 점수가 40점 대, 50점 대를 맞았다. 정국이가 좋아하는 수학 과목마저 이번 기말고사에서 60점 대가 나왔단다. 어머님 심정도 나의 심정도 슬프고 찹찹하다. 아이는 아프고 아픔이 길어지다 보니 한창 예민할 시기라 짜증과 부정적인 마음이 복리의 크기로 심해졌다.
정국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그 학생은 정말 오래 참았다. 어머님 입장만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두 분에 대해서만 여유롭게 생각하지 말자. 오늘 아침에는 나 자신에게도 여유를 가지고 관대하게 생각해 보자. '아무리 네가 생산자라 해도 너만 바뀌어야 하고, 반성해야 하는가? 학생 아픈 것까지? 너무 자신에게 빡빡하게 굴지 말고 여유롭게 생각해 주길 바래. 네가 너를 사랑하지 않고 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힘들 때 누구를 의지하겠어?'라고 자신에게 말해 주련다. 돈을 받고 일하는 입장이지만 나도 나름의 고민과 좋은 태도를 갖고 학생을 지도하기 위해 노력했으니까. 나의 입장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해도 한 없이 부족하게 생각되지만 그래도 잘해왔다.'
아는데, 가장 처음 드는 마음은 오히려 위축감이다. 정국이를 아프게 한 사람이 나는 아닌데 죄인 같고 무능하게 생각되는 부분도 있다. 이 생각을 올바로 잡기 위해 글을 쓰기로 했다. 비즈니스 측면으로 객관적으로 봐서 나의 능력이 좋지 않다. 강사로서도 학원 운영자로서도 대단한 실력가가 아니다. 큰 성과를 속도감 있게 올리지 못하고 있다. 원인을 찾으면 10개 넘게 찾을 수 있다.
근원이 나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원인 요소' 또한 찾자면 많다. 나를 만났던 시기에 동업자인 친 남동생은 이미 사업자로서 에너지가 없었다. 동생과 나는 사업 시작 전에 '소통'을 많이 해왔던 관계는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동생의 마이너스 에너지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조차 못했다. 수학 대표 선생님으로 모신 장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기존의 학원 운영자로서 확장 시기에 동업한 영어 원장님과의 큰 마찰로 힘들게 헤어졌다고 했다. 그 뒤 요식업 분야로 사업을 시도했는데 그 일 또한 동업자에게 아주 크게 사기 수준의 피해를 당한 후였다.
그런 정황을 상세히 모른 채 나는 이 분들과 함께 일을 시작했다. 스타트업 시작하는 것처럼 하고 싶어 하는 의욕은 내게만 있었다. <팀워크>에 대한 기대감과 사업 자체에 대한 통 큰 비전을 가졌다. 일이 진행될수록 코로나라는 외부적인 상황뿐만 아니라 내부적인 거센 돌풍이 1년 넘게 계속되었다. 좌충우돌. 분쟁과 화합을 위한 수많은 대화 시도. 괴로웠다. 다시 울기 시작했다. 기도도 시작했다. 아무리 더워도 아무리 추워도 눈뜨면 무조건 걸었다. 저녁에는 달렸다. 그래야 살 것 같았고 덕분에 살아남았다.
그 시기보다 지금은 정말 평화롭다. 각 자의 일을 각 자의 몫으로 하면 된다. 정국에 대한 통화 내용처럼 수학만 듣고 영어는 그만둔다 해도 남은 학생들이 훨씬 많다. 나의 밥벌이에 대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비전 이루는 시간까지는 길어지는 느낌이다. 자영업자로 살면서 생긴 긴장병과 그로 인한 초조병이 있다. 게다가 목표를 희망하는 일조차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잠시겠지만.
무너지는 마음을 새롭게 세우면서 반복하면 그 성향 또한 강해진다.
잘 세울 수 있다. 금방 일어난다.
그러면 됐지 싶다. 그래 정리해 보자. 정국이는 오래도록 아팠다. 어머님은 더 아팠다. 나는 어땠나? 정국이처럼 아플 수 없고 어머님 마음과도 다른 게 사실이지만 나도 아프고 안타까웠다. 우리는 서로 최선을 다했다.
어머님도 너무 멋지고 우리 정국이도 너무 멋지다.
오늘은 이 마음만 간직하고 기억하련다.
앞으로의 우리의 인연이 어찌 이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이 마음으로 정국이를 응원하며 바라보고 대화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