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시.
사랑은 행복을 약속한다.
불완전한 사람은 사랑에 이끌린다.
삶을 위해 존재의 무게감은 무언가가 필요하다.
사랑은 그 자체로 고귀하고 순전하며 완전하다.
불완전한 인간에게 완전함을 성취하는 길이 있다 속삭인다.
유혹한다.
사랑의 이끌림으로 행복의 절정을 약속받은 자다.
사랑에 빠져든다.
생각하고, 관찰하고, 함께 하며 점점 더 매료된다.
화사하고 아름다웠던 사랑의 매력은 치열한 나의 현실과 조화를 이루기 어려워진다.
달콤하기만 했던 유혹이 이제 다른 대가 지불을 요구한다.
나의 불완전함을 들춰내고 나를 조정하고
잔인한 감정의 샘물을 퍼올려 마시도록 버려둔다.
질투.
사랑하던 너를 볼 때면 괴로운 이 시간들은
나로 인함인지 너로 인함인지?
사랑의 선택을 따르지 않았다면
감춰져 있을, 드러나지 않았을,
나의 비참한 세계를 만나게 된다.
은밀하게 숨겼건만 다시 대면한다.
더 깊이 사랑했건만 더 과하게.
방황하는 방랑자로서 인간의 자취는
이제 벗어나는 길을 선택하는 게 사랑이었다.
너의 재능, 너의 부요함,
너를 향한 태양의 결실마저 나는 자잘하게 질투한다.
나를 사랑하며 내가 사랑하는 “헤르만 헤세”의 고백처럼 “한 마리의 이리”처럼
질투는 나의 정체성을 “이리”라 부른다.
사랑의 유혹으로 인함인가?
완점함을 동경하는 한 인간을 어김없이 패배자로 만드는 진리의 법칙.
높은 보좌에서 승리의 쾌감만을 즐기는가?
죄인의 고독을 벗어나는 길이 사랑이라서 이끌었던 보좌의 권위는 대체 어디에서 침묵을 유지하는가?
“이리”보다 더 잔인하게 물어뜯고 싸우는
허무한 인간들의 조용한 내면의 전쟁을 참관하는 것 같다.
대답조차 돌아오지 않는 혼자만의 울림은 아닐 텐데.
초조함에 쫓기었다.
다행히 이전부터 알았던 구도자들을 기억한다.
구도자들의 흔적을 찾다 보면 다시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
혼란과 방황 속에서 습관처럼 손에 쥐고 써내 린다.
너를 향하던 사랑이라 착각했던
나의 열망과 채움을
나만의 다중적인 욕구를 비판 없이 기록한다.
기록은 수용이다.
인정을 승인받는다.
기록 자체는 마음을 응시한다.
평가 없이 바라본다.
‘혼자였구나’
‘아플 만큼 외로웠구나’
‘울었지만 방법을 찾지 못했구나’
‘거절당했던 고통이 너를 삼켰구나’
‘두려웠구나’
‘거친 두려움으로 또 너를 미워했구나’
‘오해했었구나’
‘고통스럽게 자책했구나’
‘작은 사랑을 구걸할 만큼 여렸구나’
‘그랬구나 ~ ’
’힘들었겠다.‘
잠잠히 곁에 있을 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파도가 밀려왔다 떠나는 시간이 흘렀을까?
구도자들의 흔적을 통해 항상 곁에 있던 태양의 따사로움을 발견한다.
질투는 진리의 빛으로 덮였고 수많은 이리떼들도 사라졌다.
평안한 호흡으로 아늑히 마음에 쌓여 오는 빛에 손을 뻗고 다시 발을 옮기려 준비한다.
방랑자로만 살기에
질투의 힘
언제나 나의 기쁨을 탐하는 이리떼는 강하다.
진정한 순례자로서 길을 가려면
가혹하리 만큼 억울한 그 훈련을 지나야 한다.
허나, 사랑만이 순전해지는 여정이라며
구도자들도 그 선택을 삶을 다해 지켜갔다.
참고 서적 : 황야의 이리
번역 : 권혁준 ⭐️
좋아하는 시 : 사랑에 대하여 ‘예언자 중’
시인 : 칼릴지브란
알고 보면, 충분히 받았을 텐데 항상 결핍에 시선이 끌린다. 자족을 배우고 서두르지 말자. 감사를 기록하자. 사랑의 대상이 무엇이든 사랑을 통해 내가 거듭나서 새로운 자아로 성장하는 과정인 것이다. 사랑도 나의 성숙의 깊이만큼 하는 거다. 내 키가 갑자기 자랄 수 없다. 이처럼 내면의 성장과 성숙도 성실히 생명을 추구하고 사랑을 실천할 때 자라고 깊어진다. 그냥 가는 거다. 언젠가 꿈꾸던 ‘타샤의 정원’처럼 나를 통해 마음의 정원이, 나를 통한 ’어떤 아름다운 장소‘가 이뤄질 것이다.
기뻐하자.
연약하고 악한 자아를 들여다보았다면,
인정하고 항복하며 기다릴 때
구원은 도달한다.
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