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착한 어린이지.’
(미덕의 강요)
‘저 아이는 착해서 누구나 좋아해.’
(일반화오류, 혹은 편향적 해석)
‘학생들이 다 착해서 수업을 잘 따라줘서 고마워요.’
(다양성의 억압)
‘착한 네가 참아야지.’
(무조건적인 수용)
‘넌 착하니까 이 부탁도 들어줄 거지?’
(자기희생 강요)
‘그 사람은 착하니까, 이렇게 말해도 괜찮을 거야.(이해할 거야)’
(타인의 욕망을 위한 이용)
‘착하다’라는 말은 단순히 도덕적이고 바른 행동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온화한 성품, 바르고 상냥한 행동, 혹은 순응적인 태도, 다른 사람과 잘 지내려는 노력이나 공감에서 비롯되는 행동들이 착함의 본질이 아닐까. 그런데 이런 착함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며 아주 개인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으로 이해될 여지가 많다.
바로 ‘착함의 왜곡’이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갇힌 사람들을 교묘히 이용하는 사람들. ‘착한 사람은 잘 거절하지 못한다’라는 것을 전제로 상대의 선의를 강요한다. ‘저 사람은 착하니까 이 부탁은 거절 못할 거야.’ 착한 사람 틀에 갇힌 사람들은 정말 착할까. 착하다는 상대적인 것이라 했다. 자신으로 인해서 타인이 실망할까 봐 상처를 받을까 봐, 되려 자신에게 더 박하고 못되게 구는 사람들. 그 편이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지만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지 않을까.
“선생님은 참 착하신 것 같아요.” 20대, 강사시절, 어느 학원원장으로부터 업무 초반에 자주 듣던 말이었다. 착함의 기준은 온전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필요과 기대'에 맞춰졌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착하다 것이 감투인 듯, 과한 수업업무를 부탁받았고, 이미 나의 수업일정으로도 바빴지만 거절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가면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때부터인가 ‘당신은 착하니까’라는 말이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 일종의 ‘지시’처럼 느껴졌다. 부탁받은 수업은 점점 착한 내가 떠맡아야 하는 당연한 것이 되어갔다.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예전과는 다른 시선이 느껴졌다. 스트레스로 수업을 줄여줄 수 있을까라는 말에 ‘책임감이 없다’라는 말이 돌아왔고 그 말은 마치 경고의 말처럼 들렸다. 착함이 더 이상 나의 선택이 아닌 의무가 되었을 때, 그것은 무거운 짐으로 변했다. 일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고, 나를 가두고 있던 바보 같은 ‘착함’이라는 틀을 부수어버렸다.
“원장님, 저 이번 학기까지만 하고 그만두겠습니다.”
“선생님, 책임감이 이 정도로 바닥이실 줄은 몰랐네요”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정말 여러 바닥을 본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어떠한 의미로 남기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착함의 본질을 왜곡하여 도구화시키는 추한 바닥을 본 것을 인생의 큰 배움으로 남겼다. 착함의 틀을 벗어나니 ‘착한 척’이라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착함의 본질이 조금 평가절하되는 감이 없지 않으나, 지금도 나는 여전히 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 하지만 착함이 나를 억압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내가 나의 한계를 넘어서는 착함을 강요하지 않고, 나와 타인의 관계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늘 바란다. 단순히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와 타인을 연결 하는 진심에서 비롯되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의 근간에는 각자의 삶이 있다. 누군가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생각해 보면, 가장 좋고 훌륭한 ‘최선’이라는 말은 지극히 자기 위주의 결과물이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제 나는 착하다는 말을 듣기 위해 살지 않는다. 대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착하게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