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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역사 #신형철

시를 읽으며 너에게 보내는 마음

by 노미화

#엄마의첫번째독서편지


어느 날, 괜히 마음이 무거운 날이 있어.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그냥 그런 날이 있어. 그런데 그 무거움이란 것도, 누군가의 삶과 비교하면 별것 아닐 수도 있겠지. ‘엄살은...’하고 속으로 혼자 조용히 생각하다가 문득 서운해지는 거야. 왜 내 마음을 자꾸 별거 아니라고 여겨야 할까?

엄마는 그런 날들의 어느 하루에, 아주 작은 말들을 만나게 됐어. 시(詩)라는 말들이야. 어렵고 낯설기도 한데, 신기하게도 그 안에는 내가 느낀 감정들이 담겨 있었어. 사실 엄마는 시가 어려워. 책장에 시집도 몇 권 없다는 걸 고백해. 계속 계속 읽어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를 때도 많아. 그런데 말이야.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선뜻 알 수는 없지만,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그 단어들의 의미 속에서 드문드문 나의 목소리도 들려. 신기하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알 것도 같은 느낌. 어릴 적 네가 아기였을 때, 너의 표정만 봐도 무슨 감정이고 무엇이 필요한 건지 알아채는 엄마로 돌아간 기분이랄까.


『인생의 역사』라는 책을 읽으며 알게 됐어. 시는 사람들의 ‘살아 있는 마음’이 모여 있는 곳이라는 것을. 꼭 커다란 슬픔이나 기쁜 일만 적는 게 아니라, 작고 가볍고 사소한 감정들도 다정하게 안아주는 언어라는 걸. 그래서 마음이 무거운 어느 날 엄살스런 엄마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 책이라 생각해. 너에게도 이 말을 꼭 하고 싶어. 마음이 무거울 땐, 꼭 누군가의 삶과 비교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너의 감정도 충분히 소중해. 시처럼 말이야.


사실 이 책은 시집이 아니야. 신형철이라는 문학평론가가 쓴 시에 대한 이야기야. 시인들의 시를 하나씩 꺼내서, 그 안에 담긴 마음을 조심스럽게 펼쳐 보여주는 글이지. 엄마는 이 책을 읽으면서, 거짓말을 조금 보태어, 시가 단지 어렵고 멀게만 느껴지지 않게 되었어. 신형철 평론가의 해석은 엄마가 입을 못 다물 정도로 놀라웠고 흥미로웠거든. 몇 번을 무릎을 쳤는지 몰라.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구나', 말로 다 할 수 없는 마음도, 시는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구나 싶었어. 책 속에 인용된 시들도 좋았고.


프롤로그 첫 장을 펼치자마자 바로, 시 한 편이 나와. 평론가의 이야기를 읽기 전에 처음 마주 하는 시였지. 엄마는 이 책에서 처음 나온 그 시가 너무나 강렬해서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어. 엄마의 마음이 그랬거든. 엄마의 목소리였거든. 평평한 종이 위에서 단어들이 입체적으로 튀어나와 눈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거야. 신기하지?

그 구절들을 너에게도 조금 들려줄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베르톨트 브레히트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여덟 살쯤인가, 네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지. "엄마? 엄마 세상이 무너지면 내 세상도 무너져?"

잠깐동안이지만, 질문의 의도를 몰라서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되물었더니 너는 이렇게 대답했지. "엄마가 죽으면, 이 세상에서 없어지면, 우리 세상도 없어지나 싶어서." 그 말을 듣는 순간 엄마는 겉으로는 담담한 척을 했지. 너무 어린 너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는데도, 그 안엔 사랑과 두려움이 함께 담겨 있었거든. 너는 엄마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나 봐. 너는 아마 '우리의 세상은 견고할 거야''아무 걱정 마'라는 엄마의 확답을 듣고 싶었는지도 몰라. (그런데 너의 세상이 무너지면 엄마는 분명 무너질거같아)


그런데 있잖아. 엄마도 그랬어. 누군가 나에게 "당신이 필요해요"라고 말했을 때, 비로소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기더라.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는 말이 그냥 문장이 아니었어. 너를 안고 살아야 했던 그 무수한 날들의 마음이 그 문장 안에 다 있었거든. 그러니까 말이야 너의 그 질문도, 엄마가 이 시에 대한 여운을 잊지 못하는 이유도 결국 같았던 것 같아. 누군가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리고 그 존재가 무너지지 않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는지를,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라는 문장과 너의 한마디가 똑같이 말해주고 있었던 거야. 어린 너는 시라는 게 뭔지도 몰랐을 텐데 말이야.


그래서 엄마는 이 구절을 읽을 때, 또 한 번 마음이 멈춰 섰어.


우리말 '보살피다'는 '살피다'를 품고 있다....
돌보는 사람은 언제나 조금 미리 사는 사람이다. 당신의 미래를 내가 먼저 한번 살고 그것을 당신과 함께 한번 더 사는 일. (316쪽)


지나온 모든 순간이 의미 있게 다가왔어. 저 문장들은 엄마가 너와 함께 살아온 시간들, 그리고 앞으로도 너를 위해 조금 먼저 살아가고 싶은 마음을 단정하고 다정한 문장 하나로 정리해 주었지. 마치 "당신이 필요해요"에 응답하듯이 말이야.


시라는 게 참 신기해. 질문을 냅다 던져놓고 답은 '알아서들 찾으세요' 하는 것 같잖아. 시에 대해 잘 모르는 엄마는 신기하다는 진부하고 멋없는 말로 밖에는 아직은 설명이 안되는걸. 하지만 이 책을 읽으니 조금은 알 것 같아. 시를 곁에 두고 '살아가는 일'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다면, 조금은 덜 외로울지도 모르겠다고. 어떤 날은 무거운 마음도 괜찮다는 걸, 작고 사소한 감정들도 소중하다는 걸, 무엇보다 누군가를 '조금 먼저 살며' 돌본다는 일이 얼마나 다정하고 용기 있는 일인지 알게 된다는 걸.


이 모든 걸 너에게 미리 가르치고 싶다는 욕심보다는 이렇게 너에게 글을 쓰며 너와 함께 천천히 알아가고 싶어졌어. 시처럼 말이야. 느리고, 어렵고, 가끔은 아득하게 멀게 느껴져도 언젠가는 마음에 닿을 수 있는 말들처럼.


언제쯤 네가 이 글을 읽을지 모르지만 네가 살아가는 동안에도, 마음이 무겁고 이유 없이 울적한 날들이 올 거야. 그럴 땐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시 한 편을 꺼내 읽어보렴. 그리고 네 감정을 너무 작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 감정이 바로 '살아 있는 너'니까. 너의 『인생의 역사』도 이렇게 차곡차곡 써 내려가길 바라.



#인생의역사 #신형철

#엄마는책스타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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