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미화 Nov 05. 2024

엄마는 모르지? 나는 다 아는데.

자연스러운 소멸 혹은 축적

글도 정신도 다 때가 있어, 시간이 흐르니 말투가 바뀌고, 시선도 달라지며, 그렇게 쫓아다녔던 어떤 질문은 무화(無化)되어 흔적도 없다. 하지만 그 모든 망설임과 이불킥, 설렘과 기쁨의 총합이 지금의 나이므로, 크게 버릴 것은 없어 보인다.  이수지 작가의 <만질 수 있는 생각> 중에서




 어느 것 하나 스스로 못하던 아이들은 휙휙 자라나 제 손으로 작은 것들을 하나 둘 해낸다. 종이접기 설명서도 못 읽고 낑낑거리다 결국 울며 나에게 가져와 하나하나 다 접어주고 가르쳤던 순간도 아득하다. “못하겠어. 너무 어려워. 그런데 접고 싶어. 어떻게 해야 해? 엄마?” 라며 울상을 짓던 아이는 어느새 “엄마는 이런 거 못 접지? 나는 다 아는데.”라며 핀잔을 주는 나이가 되었다.



 아이가 처음 종이접기를 시작했을 때는 내 손을 거치지 않는 결과물이 없었다. 네모나고 평평한 종이가 입체적인 어떤 모양이 만들어지는 것이 신기했는지 아이는 계속 다른 결과물을 원했다. 피곤함과 귀찮음이 차곡차곡 쌓이고 쌓여도 ‘그래, 눈으로 많이 보면 뭐든 배워가는 게 있겠지’라며 손톱을 세워 종이를 긁어 누르고, 겹쳐진 부분의 빈틈 하나 없이 접어 예쁘게 만들어줬다.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났다. 아이의 손으로 넘어간 종이접기는 내가 했던 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엉망으로 접어졌고 엄마처럼 예쁘게 접을 수 없다는 사실에 아이는 스트레스를 받았다. 여섯 살 아이는 울음으로 짜증으로 색종이가 본인 손으로 접어질 때까지 떼를 부렸다. 상황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고작 여섯 살 아이는 행복의 역치는 낮고 망각의 빈도는 높았다. 며칠 뒤 기분 좋은 얼굴로 다시 색종이를 가져와 종이학을 접어 달라고 했다. 이미 나는 다른 전략을 세웠고, 나의 어설픈 연기는 아이에게 언제나 잘 먹힌다는 걸 이용했다. 학을 접는 방법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고 실제로 몇 번이나 접으면서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이는 입술이 삐쭉 나왔고 엄마는 분명 해낼 거라 생각했는지 기다렸지만, 학은 그날 끝내 만들어지지 않았다. 나는 아이가 접을 수 있는 강아지, 물고기, 튤립으로 노선을 바꿨다. 그전에 약간의 연기는 필수였고, 다행히 아이는 자신이 따라 접을 수 있는 것들을 보고 직접 해보더니 강아지를 성공시켰다.



 아이와 함께 색종이를 접는 건 참으로 예측할 수 없는 즐거움이 있다. 색종이 한 장을 쥐고 무언가를 만들겠다는 표정으로 가위와 테이프 풀을 가지고 앉아 나를 쳐다본다. 그 순간 아이는 이미 머릿속에 가득 찬 질문들을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한다. “엄마, 이번엔 어떤 걸 만들지?”“ 엄마 이렇게 접어야 세모가 돼?”“ 엄마 이렇게 접으면 비행기가 배가 되지 않을까?”



 한참을 같이 접던 어느 날, 아이는 질문도 없이 손만 바쁘게 움직였고 곧 무언가 만들 수 있을 거라 믿었는지, 차분하게 자신의 손끝을 주시하며 색종이를 접고 또 접었다. 잠시 뒤 색종이를 툭 내려놓았다. “왜? 뭐가 잘 안돼?”라고 묻자, “아니, 엄마 이렇게 뭘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잘 안되네. 그런데 재밌어.”라고 대답했다.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미완성 속에서 아마 자기만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발견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 후로도 아이의 색종이 접기는 늘 손에서 구겨지고 펴지다가 불완전한 작품으로 끝나곤 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엔 상황이 제대로 흘러가고 있음에 안도했다. 불완전함 속에 아이는 그다음에 해야 할 무언가를 꼭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시행착오였을 것이다.



 아이는 색종이를 접고, 오리고, 테이프로 붙이며 말도 안 되는 자신만의 창작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덕지덕지 엉켜 붙은 색종이는 자동차도 되었다가 집도 되었다가 나도 되었다. 종이접기 책들을 제대로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아이는 불필요한 가위 풀들을 모두 치워버리고 색종이와 책만 가지고 다니며 종이접기를 했다. 덕분에 집구석구석에는 접다가만 종이들이 돌아다녔고 때때로 만들어진 아이만의 완성품들은 전시의 목적으로 또다시 구석구석에 진열되기 일쑤였다. 안 그래도 정리를 못하는 나는 예쁜 쓰레기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몰라 골치가 아팠다.




 무화(無化)라는 말의 단상이 너무나도 길었다. 이 말이 하고 싶었나 보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는 의미를 갖지 않게 되는 건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버리고 포기하지 않는 이상. 중요하고 공들이고 소중하게 생각한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시야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을 뿐 어떻게든 존재한다. 자연스러운 소멸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다른 이름으로 말하고 싶다. 자연스러운 ‘축적’.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제 질문들을 찾고, 그 질문들 속에서 그들의 모습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온전히 무화(無化)될 수 있을까.



“엄마는 이런 거 못 접지? 나는 다 아는데.”


그거 하루아침에 다 알아버린 게 아닌 걸 엄마가 다 아는데.



언제나 아이들에게서 인생을 다시 배운다는 말이 지겹지가 않다.

자, 이제는 무화(無化)된 ‘나의 것’을 찾아볼 차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