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 초라 퇴근이 늦어졌다. 현관문을 열기 전, 크게 심호흡했다.
집안 상황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밤 열 시가 훌쩍 넘었건만, 방마다 불을 환히 밝힌 채 아이는 기다란 장난감 총을 들고 신나게 돌아다니며 놀고 있었다. 식탁 주변에는 지퍼가 활짝 열린 책가방이 토하듯이 책과 공책을 쏟아내며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식탁은 먹다 남긴 음식 찌꺼기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거실에는 아이와 남편이 벗어놓은 옷가지가 지구 표면의 6대륙처럼 펼쳐져 있었고, 남극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커다란 택배 상자가, 나머지 공간에는 과자와 젤리 봉지가 작은 섬들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집안 꼴이 이게 뭐예요? 침대에 누워있어야 할 아이는 왜 돌아다니고?”
눈앞의 상황에 관해 짐작하고 있었음에도,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집 어디선가 아이에게 아직 안 자고 뭐 하냐며 화내는 척하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가 없다. 그나저나, 남편 모습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예요, 당신?”
두리번대며 아까 소리가 났던 주변을 살펴보니, 남편은 거실 창가 벤치형 의자에 시원한 속옷 바람으로 누워있다. 살구색이 감도는 긴 나무 의자 위에 철썩 달라붙어 있는 남편을 보니, 보호색을 띠고 나무에 붙어있는 동물 같았다.
“밥 먹고 여태까지 이 자세로 핸드폰 보며 누워있었던 거야?”
“아, 아니야. 운동도 했어.”
그때, 아이가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눈웃음을 지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빠, 아까 운동하신 거 맞아요. 앉았다 일어났다 하시던데? 화장실 갈 때였나, 아마?”
“뭐라고? 그나저나 저 택배는 수박 아니야? 수박 도착했으면 잘라달라고 부탁했던 거 기억 안 나요?”
그때 갑자기 아이가 내 옷자락을 잡아끌며 말했다.
“엄마, 나 내일 학급 회장 선거 나가보려고요. 선거 공약 정리해야 하는데 좀 도와주실 수 있어요?”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선생님께서 어제 말씀하셨는데 엄마 어제도 늦게 들어오셔서.... 나도 혼자 해보려고 했는데 생각들이 막 머릿속에 둥둥 떠다녀서 정리하는 게 어려워요.”
“지금이 몇 시인데, 아빠랑 했어야지! 자긴 정말 대체.... 나는 퇴근하면 밥 하지, 빨래하지, 청소하지, 아이 숙제 시키지. 나도 퇴근하면 지쳐서 만사 젖혀놓고 누워서 뒹굴뒹굴하고 싶은 맘이 굴뚝같다고!”
남편은 내게 대꾸하지 않은 채 또다시 아이를 향해 화내는 척했다.
“이 녀석! 학급 회장 선거 공약을 네가 쓸 수 없으면 나가지 마! 그게 맞지!”
남편의 말에 기가 막히면서도, 그게 맞다 싶기도 하면서도, 또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안내만 해도 될 것을 이렇게 방치한 그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일단 늦었으니 어서 자!”
아이를 방으로 들여보내고 욕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줄기가 쏟아지자, 마음이 누그러졌다. 지난 학기에 학급회장 선거에 나가고 싶어 하던 아이를 만류했던 일이 떠올랐다. 아이가 학급회장을 맡게 되면 학부모로서 지원할 만한 시간적 여건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1학기 임원 부모들의 활약을 보며 어이쿠, 아이를 말리길 잘했다 싶으면서도, 한 학기 내내 아쉬워하며 다음 학기에는 선거에 나가도 되겠냐고 몇 차례나 조심스럽게 묻는 아들을 보면서 안쓰럽고 미안해하던 참이었는데....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데 기회를 막지는 말자.
샤워를 마치고 아이 방에 들어가서 어두운 침대맡에 앉았다. 속상해하는 아이를 토닥거리며 학급 친구들에게 공약하고 싶은 내용을 일단 엄마에게 말해보라고 주문했다. 아이는 생각보다 구체적인 공약 내용과 전략을 갖고 있었다. 둥둥 떠다니는 생각 주머니들도 잘 연결했다. 엄마의 확인이 필요했던 거였군. 인정과 자신감. 막 잠이 든 아이 이마를 쓰다듬고 있는데 남편이 수박 써는 소리가 들려왔다. 달콤하고 사각사각한 수박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장면이 상상됐다. 피로감으로 쓰디쓴 입에 달달함이 퍼지는 듯했다. 식기세척기에서 설거지가 완료되었다는 알림음도 울렸다. 아, 남편이 아이 저녁밥 지어 먹이고, 설거지까지 해놓은 거구나. 주방으로 나가 수박을 썰고 있는 남편 곁으로 다가갔다. 커다란 유리그릇을 꺼내 큐브 모양으로 예쁘게 자른 수박을 옮겨 담으며 아이에게 하듯 남편을 칭찬했다.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것 같았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남편의 입꼬리도, 어깨도 올라갔다.
다음 날, 핸드폰 진동이 울리며 학교 담임 선생님께서 보내신 학급 알림장이 전송되었다. 학급 회장에 아들 이름 세 글자가 적혀있었다. 어젯밤 시원해지라고 냉장고에 넣어둔 수박 조각을 한 입 베어 문 기분이었다. 학급 임원 부모 역할은? 세상에서 가장 외향적인 남편이 하면 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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