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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베리 Jul 01. 2023

아들의 체스 대회

어른과 아이의 대결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이 체스 대회에 출전했다. 사람이 북적대는 곳도, 사람 앞에 나서는 것도 싫어하는 아이는 방과 후 체스 선생님의 대회 출전 권유를 단칼에 거절했다. 우리 부부 이것이 네게 유익한 경험이 될 것이라 아들을 설득했다. 아무리 설득해도 꿈쩍하지 않던 아이는 대회에 참가하면 수제버거 사주겠다는 제안에 바로 대회에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대회 당일, 세 식구가 출동했다. 말 그대로 경험을 쌓기 위한 출전이기 때문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대회장에 들어서니 아이들과 부모들이 건물 두 개 층을 빽빽하게 메우고 있었다. 그 광경에 초장부터 숨이 막히는 듯했다.


 대진표가 나왔다. 첫 대결 상대는 노랑머리 외국 아이였다. 아들의 손이 차갑고 축축해졌다. 응원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극성 엄마 같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몰려와 황급히 시합장을 나서는데 시합장 바깥 차가운 계단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아들을 지켜보는 인도인 부모를 보니 나는 극성의 글로벌 기준에는 미치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대기실에서 책을 펼쳤는데 책장이 안 넘어갔다. 남편이 중얼거렸다.

 “첫 대결 상대 말이야, 영국인인데 쉽지 않겠어.”

 “영국인인 거 어떻게 알았어?”

 “딱 보면 몰라?”


 시합을 마치고 내려오는 아이 눈에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아이를 꼭 안아주며 수고했다고 속삭였다. 우리 아이가 '엄마', ‘아빠’를 배울 때 체스 기물을 빨며 ‘퀸’과 ‘킹’을 배웠을지도 모르는 영국 아이와의 경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가 2라운드 시합에 들어갔다. 목이 타서 음료수를 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영국인 엄마를 만났다. 쓸데없이 집요한 구석이 있는 나는 '영국인'에게 '어느 나라 사람인지' 물었고 '우크라이나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자리로 돌아와 남편에게 속삭였다.

 “아까 1라운드 대결한 아이 엄마, 영국인 아니고 우크라이나 사람이래.”

 남편이 중얼거렸다

 “분명, 남편은 영국인일 거야.”

 “남편이랑 우크라이나 말로 대화하던데?”

 “그 사람이 남편인지는 확인해 봤고?”


 영국이 체스 종주국이었나? 남편은 왜 영국에 집착하는 것일까. 하지만 남편은 아들의 대결 상대가 영국 아이였기 때문에 우리 아이를 이겼다는 강한 신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중에 검색해 보니 우크라이나야말로 체스 강국이었다.)


 두 번째 시합은 이길 거야. ‘승패에 상관없이 즐기고 오자’라는 말 뒤에는 ‘평상시 고학년 아이들도 이기곤 하니, 저학년 아이들끼리의 대결에서 우승은 어려운 일이 아닐 거야’라는 생각이 숨어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런데 시합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이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 일그러져 있었다. 아이를 웃음과 포옹으로 맞아주었지만 내 마음은 먹구름으로 덮였다.


 세 번째 시합. ‘즐기자’라는 생각은 온대 간데없이 사라지고 나는 손깍지를 낀 채 기도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내려오는 문을 뚫어져라 응시하면서. 시합을 마친 아이가 이번에는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내려왔다. 초록은 동색이라더니 나도 아이 아빠처럼 근거 없는 국제적 상상력이 차올랐다. 이번 대결한 녀석은 중국 아이였을지도 몰라. 교육열 높은 집에서 돌 때부터 장기 대신 체스를 배우며 자란 아이.


 네 번째 시합에서는 대놓고 월드컵 한일전을 응원하는 것처럼 응원했다. ‘반드시 이기고 돌아와라, 아들!’ 다행히 이번에는 눈에 살짝 웃음을 매달고 왔다. 안도의 한숨이 길게 나왔다.


 드디어 마지막 시합. 수능 고사장에 아들을 들여보내 놓고 간절히 기도하는 어미의 심정이 되었다. 엿이 있었다면 몰래 문에 붙였을 것이다. 드디어 시합을 마친 아이가 내려왔다. 아이 표정을 보니 도무지 승패를 가늠할 수 없었다. 시합 결과는 중요치 않다고 아이에게 수십 번 말해왔던 것이 결국 반어법이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아주 치열한 승부였나 보구나... 결과는?”

 “이겼어요.”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아들 손을 붙잡고 밖으로 나오자 속이 메슥거리며 토할 것 같았다. 오래전 임용고시를 마치고 나왔을 때 딱 이 느낌이었다. 멀쩡해 보이던 남편은 집에 오더니 우루사를 꿀꺽 삼키고 쓰러져 잤다.


 아이가 많이 실망했을 것 같지만 배운 점도 클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다독이기 위해 오늘 대회에 관한 소감을 물었다. 아이가 밝게 답했다.

 “난 사실 1승이 목표였는데 생각보다 잘한 거야. 아주 재미있었어요.”


이번 대회는 겉과 속이 다른 욕심 가득한 어른과 투명하고 욕심 없는 아이의 대결이었다. 아들이 아닌 내가 한 뼘 자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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