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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베리 Jun 28. 2023

패션에 관하여

어느 여교사의 고백


 다들, ‘소싯적’이 있을 것이다. 나도 소싯적에는 꽤나 멋 좀 부렸다. 머리 웨이브 만드는 데 한 시간, 화장하는 데 한 시간씩, 옷 고르는 데 삼십 분씩 걸리곤 했다. 특별한 날에는 준비 시간이 두 배로 늘기도 했다. 이렇게 공들여 알록달록 꾸미고 명동에 나가면 눈썰미 좋은 상인들조차 내가 일본인인지, 중국인인지 헷갈리는지 일어로, 중국어로 호객행위를 했다. 당시 착용했던 장신구의 무게와 화려함은 신라시대 귀족 뺨칠 정도였는데 지금의 거북목과 굽은 어깨는 독서로 인함이 아니요, 매달고 다니던 장신구의 무게로 인한 변형이다. 철새가 날다가 얼어서 떨어질 만큼 추운 날씨에도 치마 길이는 두 뼘을 넘지 않았으며, 모기가 열사병으로 앓아누울 정도로 무더운 날씨에도 목에는 스카프를 칭칭 휘감고, 다리에는 쫙 달라붙는 긴 부츠를 신었다. 한마디로 요약해 보자면 ‘소싯적 나’는 국적도, 시대도, 계절도 초월한 패피, 즉  ’이었다.


 그런 나였지만, 결혼하여 아이 낳고 사십 중반을 훌쩍 넘긴 지금 거울을 들여다보면 거울 속에는 평범한 아줌마 한 사람이 서 있다. 화장은 3분 안에 끝난다. 더 꾸며보고 싶어도 화장대 위에는 창작활동을 할 만한 도구가 없다. 옷 선택은 계절보다 한 발짝 앞서는 편이다. 여름이 오기도 전에 더위에 헉헉대며 반소매 티를 꺼내 입고, 겨울이 오기도 전에 두꺼운 검은색 패딩 점퍼를 걸쳐 입는다. 얼마 전에는 옷장을 열고는 새삼 놀랐다. 내 옷장은 어릴 적 감명 깊게 보았던 만화 ‘빨간 머리 앤’ 옷장의 실사판 같았다. 내가 쓰고 있는 달랑 한 칸 반짜리 옷장에는 빨간 머리 앤의 것처럼 검은색, 갈색 계열의 목폴라 티셔츠만 한가득 채워져 있다.




 모처럼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근했다. 이런 날이면 스타일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서울 시내 한복판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참을 옷장 앞에 서서 무엇을 입을지 심도 있게 고민했다. 일단, 검정 폴라 티셔츠 중 어깨에 주름이 세 땀씩 잡혀서 멋스럽고 길이도 다른 티셔츠에 비해 1.5cm나 짧은 (심리적) 크롭티를 골랐다. 티가 검정이니, 바지도 검은색으로 선택했다. 이것이 바로 멋을 아는 이들이 선택한다 톤 온 톤.  위에 젊은이들에게 유행하는 오버핏 뽀글이 점퍼를 걸쳤다. 점퍼 역시 당연히 검정이다. 이것이야말로 꾸민 듯 안 꾸민 듯 세련된 프렌치 시크 룩 아니겠는가.  시크룩을 완성하기 위해 당연히 가방도, 운동화도 올 블랙이다.




 자신감에 가슴이 쫙 펴졌다. 당당히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는데, 내 또래 여성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몸에 쫙 달라붙는 검은색 크롭 가죽 재킷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 흰색 바지를 입었다. 블랑 누와, 누와 에 블랑... 아... 이것이 프렌치 시크인 것을...


 내 바지를 내려다봤다. 살 때는 분명 검은색이었는데 몇 번 세탁했더니 색이 바랬다. 검정도 회색도 아닌, ‘없어 보이는’ 색이다. 무릎도 툭 튀어나왔다. 리바-이쓰인데, 갑자기 진품 여부가 맞는지 의심스럽다. 앞으로 반값 이하로 할인하는 물건은 일단 잘 살펴보고 사자고 다짐한다.


 근데 저 여자는 얇은 가죽 재킷만 입고 춥지도 않나? 아, 맞다. 멋 부리려면 추위 따위는 참아야 한다는 걸 오랜 세월 잊고 있었다. 스크린도어를 슬쩍 바라보니 언뜻 거대한 까만색 짐승이 비친다. 도심에 빅풋이 나타났을 리는 없고, 당연히 저 친구는 나다. 뽀글이 겉옷을 얼른 벗어 가방에 구겨 넣다.


 잠깐, 저 여자는 조그마한 핸드백을 멨다. 저 속에 핸드폰이나 들어가려나? 노안 때문에 커다란 내 핸드폰 크기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등산 가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커다란 백팩을 짊어지고 나올 필요가 있었을까. 생수, 휴지, 물티슈, 필통, 책, 서류철, 점퍼까지 들어있는 백팩이 갑자기 무겁게 어깨를 짓누른다.


 마지막으로 여자의 구두에서 시선이 멈추었다. 구두, 구두, 구두라니! 나도 차를 갖고 다닐 때 가끔 낮은 구두를 신기는 하지만 이렇게 만원 지하철을 탈 때는 엄두 내지 못한다. 미혼 시절 11센티미터 높이의 킬힐을 즐겨 신던 내가, 지금은 족저근막염과 지간신경종 때문에 정장 차림에도 운동화를 신는다. 저분이 발 건강이 그저 부럽다.


 집에서 나온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패션에 관한 자신감은 사라지고 한없이 쭈그러졌다.




 출근하자, 만나는 분마다 조문 갈 일 생겼냐며 조심스레 물으셨다. 자리에 앉으며 의자에 걸쳐 놓은 패딩 조끼를 걸쳐 입으니 안심되었다. 교직원들 대부분이 걸쳐 입은 진한 색 패딩은 마치 유니폼 같다. 아니, 그날만큼은 안전 조끼같이 여겨졌다. 검은색 복장이 어둠에 묻히는 시간까지 학교에서 뭉그적거리다가 퇴근했다.




 며칠 후 연둣빛 상의 살굿빛 블러셔를 구입했다. 결혼하고 아이를 기른 십여 년의 세월 동안 겨울밤같이 어둡던 옷장과 광야같이 삭막한 화장대에 화사한 봄이 찾아왔다.






사진 출처

https://www.dailymail.co.uk/tvshowbiz/article-7564893/Emily-Ratajkowski-looks-chic-city-sporting-beret-mini-dres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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