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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베리 Jun 22. 2023

기차와 바퀴벌레

인생의 선순환


 인도양의 작은 섬나라에서 겪은 일이다.


 오래전이라 지금은 상황이 꽤 달라졌겠지만, 당시만 해도 그곳은 인프라가 매우 열악했다. 철도 여행 역시 낭만은 고사하고 그야말로 고생길이었다. '기차'라는 단어와 함께 연상되는 '속력'과 '쾌적함'은 바랄 수 없었다. 더위로 인해 엿가락처럼 늘어진 철로 위로 낡은 기차가 덜컹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좌석 역시, 처음 앉아보는 외국인이라면 누구든지 당황했을 것이다. 쿠션도 커버도 없는 딱딱한 ‘ㄴ’ 자 모양의 철제 의자인데, 장시간 앉아있다 보면 궁둥뼈가 의자에 갈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따라서 쿠션으로 사용할 이불은 기차 여행의 필수 아이템이었다.


 수도에서 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약 300km 남짓한 거리였지만 기차로 열 시간 이상 걸렸기 때문에 야간 기차를 타고 잠을 청했다.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뭔가가 기어다니는 듯 온몸이 간질간질한 느낌에 눈을 떴다. 아뿔싸. 그 느낌은 실로 정확했다. 내 몸 위로 엄지손가락 길이만큼 길고 통통한 바퀴벌레가 기어다니고 있었다. 까맣게 그을린 팔뚝 위를 기어가는 놈을 시작으로 목에서 배까지 미끄럼 타고 내려오는 놈, 머리카락에 대롱대롱 매달린 놈, 다리를 타고 클라이밍 하는 놈 등 내 몸 구석구석에 포진하여 득실대는 바퀴를 발견하고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꺅!’하고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녀석들을 털어냈다. 하지만 이 녀석들은 어찌 된 일인지 한국의 바퀴와는 달리 도망치기는커녕, 재미있는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달려드는 꼬맹이들처럼 다시금 내게 몰려왔다. 내가 더 크게 소리 지르며 오두방정을 떨자, 맞은편 자리에서 자고 있던 아주머니가 눈을 번쩍 떴다. 아주머니는 찬찬히 나와 내 주변을 둘러보더니 상황을 파악했다.


 아주머니 얼굴에는 피로감과 졸음이 덕지덕지 묻어있었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염려 말라는 듯이 나를 향해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잠시 고민하던 아주머니는 비장한 표정으로 신발을 벗더니 양손에 한 짝씩 꽉 움켜쥐었다. 곧이어 신발은 무기로 돌변하여 내 주변에서 꿈틀대는 바퀴를 한 마리씩 공격하기 시작했다.


 '탁. 탁. 탁. 탁. 탁.'

 1초에 한 번씩 울리는 신발과 바퀴벌레의 마찰음을 들을 때마다 나를 위해 고생하는 아주머니에게 미안한 맘이 들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규칙적으로 울리는 소리가 점차 자장가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조심스레 아주머니의 안색을 살폈다. 아주머니는 이번에도 미소 짓더니, 눈을 붙이라는 듯이 눈을 길게 찡긋하고 감아 보였다. 솔직히 바퀴벌레가 퍽퍽 터지는 장면을 지켜보는 것도 괴로웠던 터라, 아주머니에게 죄송한 마음을 무릅쓰고 방석 삼아 깔고 있던 이불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둘러싸고 잠을 청했다. 스스로 만든 자루 속에 숨어서 바퀴를, 아주머니의 고생을, 나의 양심을 외면한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불 자루를 살짝 벌려서 눈만 빼꼼 내밀고 차창 밖을 살펴보니 동이 트고 있었다. 심청이 연꽃에서 나오듯 이불을 헤치고 나와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퀴벌레를 처리하던 아주머니는 양손에 신발을 꼭 움켜쥔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지름 30cm 정도 되어 보이는 바퀴 사체 더미가 생겨있었다. 아주머니는 외국인 처자를 위해 긴긴밤 객차 내 거대 바퀴벌레 조직에 대항하여 홀로 치열하게 싸웠던 것이다. 기차가 종착역에 도착했다. 아주머니는 쉬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아주머니를 향해 나는 두 손바닥을 모으고 허리를 기역 자로 숙이며 현지어로 "감사합니다."를 되뇌었다. 아주머니께 특별한 선물이라도 드리고 싶었지만, 의상부터 짐까지 완벽한 현지화가 되어있는 내 수중에는 선물로 드릴만 한 게 없었다. 다시 한번 아주머니께 감사인사를 하자, 아주머니는 수줍게 미소 지으며 ‘노 프로블름’이라 답하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아주머니의 헌신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그날 밤 사건은 어떻게 기억될까. 아마도 바퀴에 대한 공포심으로 기차 여행도, 그 나라에 대한 기억마저도 새까맣게 얼룩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위해 애써준 여전사 같은 아주머니 덕에 그날 밤 사건은 따뜻한 추억으로 남았다. 나를 돕기 위해 타인이 고생하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잠을 청했던 내 모습이 부끄럽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크고 작은 도움을 받고 있지만, 은혜를 베푼 이에게 그것을 되갚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안다. 내가 아주머니에게 받은 호의를 갚는 길은, 어려움 겪는 이를 마주했을 때 내 손에 쥐고 있는 것으로 그를 돕는 게 아닐까. 이러한 행동은 우리 삶에 선순환이 이루어지게 할 것이다. 도움이 필요한 이가 낯선 이방인, 또는 자신의 일을 스스로 처리하지 못하는 철부지 성인, 심지어 자기를 돕는 것을 나 몰라라 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과거의 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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