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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베리 Jul 03. 2023

죽음의 키스메이트

흑색 퀸과 백색 킹, 그들의 숨겨진 사연



 주말 오후, 아이가 함께 체스를 두자고 졸랐다.  

 “엄마가 좀 바빠서.... 그리고 엄마랑 체스게임 하면 재미없을걸? 엄마는 체스 잘 모르잖아.”

 한껏 어질러진 집 청소, 이불 빨래, 쌓인 설거지 등 해야 할 집안일로 심란했다. 이런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아들은 잠시 고민하더니 다른 제안을 했다.


 “엄마, 내가 엄마한테 체스 전략을 알려주는 건 어떨까?”


 그래, 집안일이 대수냐. 아들한테 시간 좀 내어주자. 아들 앞에 앉아서 이름을 따라 말하기도 어려운 전략 세 가지를 배운 뒤 시연까지 보고서야 자유의 몸이 되나 싶었는데, 아이가 일어서려는 내 팔을 잡아끌었다.


 “엄마, 보너스로 전략 한 가지 더 알려줄게.”

 “엄마가 이젠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아. 할 일이 많거든.”

 “이번 전략은 ‘죽음의 키스 메이트’인데....”


 매혹적인 전략 명에 솔깃해졌다. 그래. 이왕 배우기로 한 거, 시간을 좀 더 내보지, 뭐.



 

 아들의 설명에 의하면, 체스에서는 상대편 킹이 공격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인 ‘체크 메이트’를 만드는 자가 게임에서 승리한다고 한다. 킹끼리는 반드시 공간을 두고 서야 하는데, 킹과 킹이 한 칸의 공간을 두고 마주 보고 있을 때 퀸이 그들 사이로 들어와 상대편 킹을 바라보고 서는 상태가 바로 ‘죽음의 키스 메이트’이다.


 “퀸이 상대편 킹과 바싹 붙어 있잖아. 키스하는 것처럼. 그 상태가 되면 상대편 킹이 체크 메이트 당하기 때문에 ‘죽음의 키스 메이트’라 부르는 거지.”

여덟 살 아이는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진지하게 설명하더니, 이해를 돕기 위해 기물을 배치하였다. 체스판 위에 흑색 킹과 백색 킹이 마주하고 있다. 그 사이로 흑색 퀸이 나타나 백색 킹을 마주한다.

“이게 바로 백색 킹이 체크 메이트 당하는 상황이야.”

 체스판을 내려다보며 나는 잠시 상상에 빠져들었다.




 백색 킹에게 키스하여 죽음을 맞이하게 한 흑색 퀸은 사실, 백색 킹이 왕자였던 젊은 시절 그의 연인이었다. 숱한 동화 속 내용처럼 사냥하러 나섰다가 길을 헤매던 왕자와  산책하던 흑색 나라 여인이 숲 속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자신들의 왕국에서는 볼 수 없는 이질적인 아름다움에 이끌린 그들은 깊고 푸르른 에서 만남을 지속하며 종달새처럼 사랑을 지저귀었다. 하지만, 그들의 밀회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 여인은 바로 흑색 왕국 왕자의 정혼자였기 때문이다. 흑색 왕국의 왕자는 왕위에 오르자 곧바로 선왕이 배필로 정해준 여인을 궁으로 불러들여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 결혼식은 흑색 왕국 백성들 모두에게 큰 기쁨이었으나, 정작 결혼식의 주인공이었던 여인도, 그녀의 결혼 소식을 멀리서 듣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한 백색 왕자도 ‘행복’이라는 단어를 잃어버린 채 깊은 슬픔의 늪에 빠져버리게 한 사건일 뿐이었다.


 운명의 얄궂은 장난 때문이었을까, 백색 왕자의 꺼질 줄 모르는 사랑의 불꽃 때문이었을까. 백색 왕자는 왕위에 오른 뒤, 흑색 나라와 전쟁을 벌였고, 그 피비린내 나는 전투의 현장에서 백색 킹과 흑색 퀸이 재회한 것이다. 세월이 흘러 머리카락이 피부처럼 희게 변하고 전쟁에서도 수세에 몰렸으나 여전히 기품을 잃지 않은 백색 킹의 모습에 퀸의 마음은 심하게 요동쳤다. 하지만 퀸은 이미 내린 결정에 관해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행보에 흑색 군사와 백성의 생사가 달려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백색 킹 앞에 마주 섰다. 찰나 같은 순간이었지만 백색 킹과 흑색 퀸은 눈빛으로 길고 긴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 다시 만났구려, 마침내.”

“맹세컨대, 당신을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어요.”

“나 역시. 그 때문에 그대를 만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소.”

“당신을 그리워하며 흘린 눈물로 인해 제 그림자가 떠내려가 버렸지요.”

“그 그림자가 내 손을 붙잡고 이곳으로 이끌었다오.”

“그렇다면 제가 당신을 죽음의 문 앞으로 인도한 것이로군요.”

“당신이 떠나간 날 내 영혼은 죽었소. 껍데기를 벗어버릴 때가 왔을 뿐.”

“기다려 주십시오. 왕이 가시는 곳이 천국이어도, 지옥이어도 저 역시 그 뒤를 따를 것입니다.”


 흑색 킹이 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흑색 퀸은 백색 킹에게 서서히 다가가 그에게 키스했다. 얼마나 간절히 원했던 그녀와의 입맞춤이었던가. 하지만, 이 입맞춤의 대가로 백색 킹은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백색 킹은 기꺼이 앞으로 한 발짝 다가가 죽음의 키스를 맞이했다. 흑색 나라 군인과 백성들의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전쟁이 끝났다.




“엄마! 무슨 생각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멍하니 앉아 있던 나는 아이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어? 체스가 생각보다 재미있다는 생각?”

체스가 이렇게 재미있다니.... 앞으로도 아들에게 틈틈이 체스를 배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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