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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베리 Jul 12. 2023

엄마와 참기름병

골뱅이무침 레시피와 참기름병 사건


 배는 슬슬 고픈데, 밥은 먹기 싫은 저녁이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새콤달콤 그리고 매콤한 골뱅이무침이 떠올랐다. 피곤하니 비빔면에 골뱅이를 곁들여서 간단하게 먹자고 주장하는 머리와 달리, 두 팔은 이미 냉장고를 휘저으며 골뱅이무침을 만들 재료를 찾고 있었다.





  골뱅이무침 레시피는 다음과 같다.


 먼저, 재료를 준비한다. 진미채와 북어포는 먹기 좋은 크기로 다듬은 뒤 골뱅이 통조림 국물에 담가놓는다. 이렇게 하면 진미채와 북어포는 부드러워지면서 단맛과 감칠맛이 밴다. 파와 양파는 가늘게 채 썰어 찬물에 담가서 아린 맛을 제거한다. 오이는 얇게 썰어서 소금에 절인다.  


 재료 준비를 마치면 양념장을 만든다. 고춧가루, 고추장, 간장, 식초, 레몬청, 설탕, 맛술, 후추 등을 섞는다. 비율은? 그때그때 다르다. 조금씩 넣어가면서 맛을 보며 조절한다. 요리를 할 때마다 유명 맛집 할머니들이 자신의 요리 노하우를 며느리에게도 안 가르쳐준 이유는 다름 아닌 정량화, 표준화 한 레시피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본인들은 오랜 세월 그야말로 '감'으로 변수를 다뤄가며 요리를 진행했기에, 수만 가지 변수를 품고 있는 식재료 및 주방 환경에 대처하는 방법을 세세히 알려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이럴 때 한국 어머니들이 사용하는 적절한 단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적당히'이다. 자, 양념장에 들어갈 각 재료는 맛과 색과 농도를 봐가면서 '적당히' 넣어 섞는다.


 다음으로는 미리 올려놓은 물에 국수를 삶아야 한다. 국수는 삶은 뒤, 찬물에 빠르게 빨듯이 씻어내어 전분기를 없애야 붇지 않은 탱글탱글한 면발을 즐길 수 있다.

  



 냄비에서 국수가 익는 동안 준비한 재료와 양념을 큰 볼에 넣고 조물조물 비볐다. 자극적인 양념 향이 코끝을 스치자,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마지막으로 참기름 한 번 둘러주기 위해 찬장을 열었다. 찬장에서 참기름을 보자 복잡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참기름은 유리 재질의 병에 담겨있는데, 병 한가운데에 두른 흰 종이 위에 ‘참기름’이라고 또박또박 쓰여있다. 엄마 작품이다. 악필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정성 들여 쓴 티가 나지만, 글씨를 갓 배우기 시작한 어린아이가 쓴 글자 같다. 차라리 하늘 위 자유로이 흘러가는 구름 같은 엄마의 필체가 더 나은데 말이다. 게다가 참기름을 담은 병은 입구 넓서 기름병으로 사용하기에는 알맞지 않.


 오일 병을 한 개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병뚜껑을 돌리는 순간, 참기름이 담긴 병이 손에서 쏙 하고  미끄러졌다. ‘쨍’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유리병이 인덕션 위로 떨어졌다. 다행히 병은 깨지지 않고 멀쩡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얼어붙고 말았다. 열어놓은 싱크대 서랍과 주방 바닥, 조금 전 샤워하고 새로 갈아입은 옷과 몸이 온통 참기름으로 뒤덮였다.


 나는 그냥 마트에서 파는 참기름 먹어도 된다는데 대체 왜 자꾸 이런 걸 시장에서 사다 놓으실까? 그마저도 한 병이 아니고, 이렇게 엉뚱한 병에 덜어 오시고. 시장에서 쓰시라고 얼마 전 온누리 상품권도 넉넉히 드렸는데 말이지.... 내가 실수해 놓고 엄마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서렸다.


 싱크대를 아무리 문질러 닦아도, 여러 차례 바디워시로 몸을 빡빡 문질러 닦아도 참기름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완벽한 청소를 포기하고 식탁에 앉았다. 빨간 골뱅이무침과 하얀 국수를 접시에 담고 황금빛 맥주까지 따라 놓으니, 황제의 식탁이 부럽지 않다. 골뱅이무침을 국수에 쓱쓱 비벼 한입 가득 넣고, 시원한 맥주도 한 모금 들이키자 속상함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점차 배가 불러오면서 마음에 여유가 찾아왔는지, 조금 전 엄마를 원망한 게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곰곰이 엄마의 맘을 헤아려 보기 시작했다.


 엄마는 왜 유리병에 참기름을 담아 왔을까. 시장에 가서 이것저것 장을 보다가 '국산 참깨로 만든 참기름'이라는 문구가 눈에 뜨였겠지. 입 짧은 딸이 고소한 참기름의 도움을 받아 조금이라도 더 먹으라고 일부러 질 좋은 참기름을 찾아다녔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이미 장 본 식재료 무게 때문에 두 병은 못 사고, 한 병을 사서 엄마가 사용할 것과 나누었을 것이다. 아니면 요리를 자주 하지 않는 내가 참기름을 묵힐까 봐 일부러 절반만 덜어온 것일 수도 있다. 조금이라도 더 신선한 것을 먹이기 위해서 말이다. 엄마는 엄마의 찬장을 둘러보며 보관하고 있는 병 중 가장 멀끔한 것을 집어 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깔끔 떠는 딸의 성격을 알기 때문이다. 막상 참기름을 옮겨 담자니 아무래도 병이 작아 보여서 입구까지 한가득 담았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참기름이 흘러넘쳐서 겉 부분을 쓱쓱 닦아내고 가져오셨을 테지. 병이 미끄러웠던 것도 그 이유였을 것이다.





 엄마는 분명, 나를 기르는 내내 엄마가 주고 싶은 가장 좋은 것을, 엄마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엄마가 지닌 가장 좋은 것에 담아 내게 주셨을 것이다. 러나 그것은 늘 내 마음에 흡족하지 않았고, 엄마에게 받은 것과 관련하여 행여 문제가 생기면 엄마를 원망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야 철이 드는지 여태껏 엄마에 대한 원망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한 나 자신으로 인해 부끄러움을 느낀다. 온 힘과 정성을 다해 나를 돌본 엄마를 이제는 내게 돌볼 차례이다. 요새 엄마가 감기 기운으로 힘없는 모습을 보인다. 엄마가 회복하면 엄마와 장에 나가야겠다. 장 볼 목록에 '참기름'과 엄마와 나를 위한 '예쁜 오일 병 두 개'를 적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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