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한 지 13년이 지나 내 앞에 나타난 너의 모습에 심장이 기쁨으로 팔딱거렸단다. 너는 수선화처럼 청초하면서도 수려하게 피어올랐으나, 눈동자 속에는 여전히 6학년 시절 지녔던 해맑은 순수함이 깃들어 있었어. 길고 긴 인사를 나눈 뒤, 우리는 식사부터 하기로 했지. 길치인 나를 대신해 네가 길을 찾아 안내했고. 너를 따라 길을 걷는데, 참 든든하더라. 네 덕분에 남미 음식을 맛보았어. 건강하면서도 감칠맛 도는 근사한 식사였단다. 식사를 마친 후 식당 근처에 있는 모 작가의 작업실로 찾아가서 그의 책에 사인을 받아 선물해 줬잖아. 에세이와 여행기를 좋아한다는 너의 말에 작가에게 연락했는데 맘씨 좋은 그는 갑작스러운 방문을 기꺼이 허락했고, 너는 작가와의 만남을 신기해하며 책 선물을 몹시 기뻐했지. 선물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해 준 작가분에게, 또 너의 반응에도 고마운 마음이 가득하다. 우리는 작가의 작업실을 나와 망원동 거리를 걸으며 소리 내어 깔깔대며 웃기도 하고, 카페에서 눈물 머금은 채 대화를 나누었지. 이십 대인 네가 겪는 어려움과 이십 대의 내가 겪었던 어려움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눈시울이 붉어졌던 것 같아. 그러다 불현듯 딸과의 데이트가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더라. 한없이 사랑스럽고, 예쁘고, 자랑스러운 너를 보면서.
이른 봄, 살얼음 덮인 땅을 뚫고 올라온 연둣빛 새싹 같던 아이가 어느새 나무가 되어있는 거야! 무성한 가지들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파도 소리를 내면서 가랑비쯤은 끄떡없이 막아주고, 반짝이는 나뭇잎은 뜨거운 햇살을 가려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커다란 나무 말이야.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란 나무가 대견하여 토닥토닥 두들겨도 보고, 쓰다듬기도 하고, 보듬어 보기도 했지. 시간이 부린 마법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감탄하는 일밖에 없구나.
오래전 추억을 꺼내 퍼즐을 맞추는 것도 즐거웠어. 어쩜 너와 내가 가진 기억의 조각들이 그렇게도 서로 다른지! 하지만 그것들을 맞추다 보니 내 기억 속에 남아있던 빛바랜 그림이 보다 크고 선명한 그림으로 탈바꿈했어. 고맙다, 이렇게 좋은 선물 들고 찾아와 줘서.
아래는 아까 잠깐 언급했던 영화 이야기야. 영화를 볼 수도 있으니까 내용 설명은 생략할게. 이 영화가 이십 대 미혼의 아가씨에게는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겠네. 아마도 일, 사랑 그리고 결혼에 관해 명쾌한 답을 주지는 못할 거야. 그렇지만 고민, 갈등, 아픔, 타협의 과정을 나 홀로 겪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어.
감독이 그러했던 것처럼 영화 속에는 현재의 내가, 영화 안 영화 속에는 과거의 내가 담겨있다. 떠나온 아일랜드의 추억 속에서 헤매곤 하는 ‘쿨하지 못한’ 사람만이 에이미가 아바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출 때 눈물을 흘릴 것이며, 현재의 사랑과 다른 빛깔의 사랑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에이미가 조셉에게 아이에 관해 내뱉은 말뜻을 이해할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현실로 돌아온다. 내 액자 속 이야기 결말이 클래식하지 않아 다행이다. 그 덕에 지금 내 곁에 있는 이와 함께 훈훈한 코믹 가족 영화를 제작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감독은 일, 사랑, 결혼에 관해 섬세하면서도 깔끔하게 묘사하며 재치 있는 장치들을 사용하여 과거와 현재, 욕망과 현실의 선을 잘 긋고 있다. 거기에서 오는 안정감이 좋은 이유는 내가 대한민국의 평범한 기혼 여성이기 때문일까.
이 세상에 과연 완벽한 성취와 아쉬움 남지 않는 사랑이 존재할까? 하지만 그러한 불완전함과 아쉬움으로 인해 인생이 완성되는 게 아닌지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