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라퍼 윗집 아줌마의 바람

by 허니베리

관성의 법칙에 따라 계속 누워만 있다 보면, 이러다 아사하겠구나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 백만 스물세 번 정도 일어날까 말까 망설이다가 시장에서 국수라도 사 먹어야지 마음먹고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세수도 하지 않고 모자만 눌러쓴 채 엘리베이터를 탔다. 타자마자 곧 덜컹 멈춘 엘리베이터는 아래층 아주머니를 꿀꺽 삼키고서는 다시 움직였다.


(윗집=나) 아, 안녕하세요. 댁에 계셨나 봐요.


(아랫집) 네... 아파서 잠시 쉬는 중이에요. 근데 왜 이 시간에 댁에 계세요?


(윗집) 저도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출퇴근 시간이 비슷해서 아침저녁이면 늘 잰걸음으로 지나치며 눈인사하곤 했는데,파서 쉬는 시기도 겹치다니!


(아랫집) 누워만 있다 보니 몸이 더 처지는 것 같아서 먹을 것도 사고 운동도 할 겸 시장이나 다녀오려고요.


(윗집) 저도...


(아랫집) 그나저나 저희 바로 윗집 사신다고 하셨지요?


(윗집) 네, 맞아요.


(아랫집) 저희 아이 때문에... 엄청 시끄러우실까 봐... 늘 신경 쓰이고 죄송해요, 정말.


(윗집) 아이고, 아니에요. 저희도 늘 쿵쿵거려서 시끄러우셨을 텐데요. 저야말로 죄송한 걸요.


(아랫집) 저희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지하철역까지 함께 걸었다. 일반적으로 이야기 흐름 상 자녀 또는 직장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데, 우리 대화는 하나의 기둥을 사이에 두고 마주치지 않으려고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지하철역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윗집) 저는 도서관에 먼저 들르려고요. 시장 잘 다녀오세요.


(아랫집)아, 네. 저희 아이 때문에 시끄럽거나 불편하시면 언제든 내려오셔서 말씀 주세요.


(윗집) 진짜 저희는 불편함 없으니, 걱정 마세요. 어서 쾌유하시고요.


짧은 대화 속에서 아랫집 아주머니는 연신 나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미안해했다. 아들을 대신해 머리를 조아리는 아주머니의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저렸다.




아랫집 아주머니의 아들은 덩치가 큰 중학생이다. 노래를 좋아하는지 늦은 밤에도 커다란 목청으로 뽀로로 주제가 같은 동요를 부르기도 하고, 화가 나면 몇 시간이고 자신의 감정을 랩 형식으로 토로하기도 한다. 하지만 평상시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엘리베이터 탑승을 양보하고 황급히 계단으로 뛰어 올라가는 수줍음 많고 착한 학생이다.


어느 늦은 밤, 이 아이와 술에 거나하게 취한 아이의 아버지가 길을 걷고 있었다. 나는 몇 걸음 간격을 유지한 채 그들 뒤를 따라 천천히 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아이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일본어인지 중국어인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노래를 큰 소리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이 아버지가 발걸음을 멈추고 아들을 향해 몸을 돌려 섰다. 순간, 나도 발걸음을 멈추었다. 긴장감이 흘렀다. 보통의 부모가(솔직히, 나였다면) 보였을 반응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의 아버지의 행동은 내 예상에서 크게 벗어났다. 그는 아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아이의 넓은 양 볼을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 아들의 눈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술로 인해 발음은 꼬였으나,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말이다.


너는 외국어 노래도 참 잘 부르는구나!


집이 코앞이었지만, 나는 그대로 그 부자(父子)를 지나쳐 앞으로 계속 걸었다. 뜨거워진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을 훔치기 위해였다.




도서관에서 나오며 넘어지면서 크게 다친 이 오지라퍼는 다시금 침대에 꼼짝없이 묶여있는 신세가 되어서도 아래층 아주머니가 오늘도 산책 잘 다녀왔는지 궁금해하고 있다. 둘 다 말끔하게 출근복을 차려입고 날아갈 듯 바쁘게 눈인사하며 스쳐 지나가는 아침이 속히 찾아오길 바라며.









이미지 출처: Freepik(작가 vec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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