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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베리 Aug 14. 2023

아들의 비밀


 책장 정리 중에 얇은 수첩 한 개가 발 앞에 툭 떨어졌다. 펼쳐보니 아들 녀석이 이런저런 내용을 기록해 놓은 일종의 비밀 노트였다. 재빨리 쭉 넘겨보던 중 충격적인 문구에 숨이 턱 막혔다.


도둑질의 미학


 너무 놀라서 머릿속이 새하얘질 지경이었다. 이 아이가 내가 아는 우리 아이 맞나? 잠시 뒤 해맑게 미소 지으며 다가오는 아들에게 이에 관해 조심스레 물어봤다. 아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아, 그거? 텔레비전 '동물의 세계'에서 나온 말인데 인상적이라서 써 본 거야. 하이에나가 먹이를 훔치는 장면에서 아저씨가 말하더라고.”


 그러고 보니 장에 ‘치명적인 아프리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이가 여섯 살 때 일이다.



 그 뒤로 아이는 무럭무럭 성장하여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일 년을 잘 보낸 뒤 종업식을 하고 집에 돌아온 아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엄마, 우리 반에 S라는 친구가 있는데 책도 많이 읽고 일기도 잘 써. 책은 벌써 500권 넘게 읽었고 일기도 서너 장씩 써서 선생님께서 칭찬하시면서 작가가 되라고 해주셨어.”


 “그 친구가 부러웠구나. 엄마 생각에는 우리 워니도 충분히 독서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데 말이야.”


 “사실 나, 그 친구랑 친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그 친구는 내가 싫은지 말 걸면 대답도 안 하고 도망가 버리더라고. 근데 내년에 다른 반에 배정돼서 친해질 기회가 더 줄었어.”


 “아이코, 워니가 많이 속상했겠네. 하지만 그 친구는 워니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닐 거야. 네 또래 여자 친구들은 부끄럽거나 상대를 좋아하면 그런 행동을 하거든.”


 아이는 이에 관해 그 뒤로도 몇 번을 더 말했다. 입이 무거운 녀석인데도 말이다. 짝사랑에 빠진 아들을 도울 길 없어 애가 타고 심란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엄마, J가 말이야...”


 “J는 누구니?"


 "J? 내가 좋아하는 친구. J도 나 좋아해. 서로 좋아하는 사이야.”


 “뭐? 그럼 S는?”


 “아, 그 친구는 말이 잘 통할 것 같아서 친해지고 싶었던 거고.”


 아들이 일 년간 공개하지 않았던 여자 친구의 등장과 함께 내가 아들의 짝사랑 대상으로 오해하고 있던 아이가 실제로는 아들이 정말 ‘친구’ 삼고 싶었던 아이였다는 사실에 실소하였다. 초등 일 학년 남자아이의 마음과 생활도 이렇게 파악하지 못하는데 사춘기가 찾아오고 성인이 되면 오죽할까. 오늘로써 아들의 사생활에 관한 추측 섣부른 개입은 접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작은 사건들을 겪으며 시어머니가 생각났다. 세상의 모든 시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우리 시어머니에게도 아들에 관한 자랑거리가 수없이 많다.

 ‘우리 아들은 학창 시절 단 한 번도 아르바이트를 해본 적이 없다. 작은 푼돈을 만지면 큰 꿈을 이루지 못하는 법이거든.’

 이 역시 단골 퍼토리이다.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대학 시절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던 내 마음은 한없이 쭈그라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나는 대학 다닐 때 아르바이트를 단 하루도 쉬어본 적이 없어. 밤새 냉동 창고에서 일하고 곧바로 강의실로 간 적도 있지. 엄마는 아마 이 사실 모르실걸?”


 그 뒤로 어머님께서 위와 같은 말씀을 하실 때마다 입이 간지럽지만, 마음 아프실까 봐 입단속 하느라 힘들다. (그나저나, 남편이 어머님 말씀 안 들어서 큰 꿈을 이루는 시기가 이토록 늦춰지는 건 아닌지.... 갑자기 눈물이 나려 한다.)


 어머님을 통해 얻은 교훈으로 인해 아들의 사생활에 대한 추측은 물론이고 그에 관해 내가 알고 있다고 확신도, 단언도 하지 말자고 추가로 결심한다. 남편이 남의 편이듯, 아들은 아득한 들로 보내야 하는 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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