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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베리 Sep 03. 2023

육회와 장어탕

막내들의 사랑


  딸 이름은 순희, 김순희올시다.
우리 막내딸 집을 찾고 있소.


 오전에 막내딸을 보러 다녀오겠다고 을 나선 할아버지는 점심을 한참 지나 세네 시가 될 때까지 막내딸 집 즉, 우리 집에 나타나지 않았다. 어디에 들렀다 오시나 싶어서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엄마는 결국 파출소로 뛰어갔고, 어슴푸레한 저녁 무렵에서야 '김영희 '을 찾는 노인을 보호하고 있다는 먼 동네 파출소에서 할아버지를 모셔 왔다.


 친정아버지를 위해 육회를 버무려 차 점심상은 저녁상이 되었다. 육회는 신선한 냉기 잃고 미지근하고 질척해졌것이다. 소주를 따라드리는 엄마의 눈가도, 소주를 받아 드는 할아버지의 손도 미세하게 떨렸다.


 생일 은 특별한 날이면 돼지고기 반 근을 떠 와  식구가 나눠던 시절이었으니, 엄마가 외할아버지 위해 준비한 육회는 어지간히 큰맘 먹지 않으면 대접할 수 없 것이다.

이도, 소화력도 약한 노인 몸보신 위해
뚝딱 내놓을 요리로 육회만 한 게 없거든.


  엄마는 변명이라도 하듯 어린 내 앞에서 중얼거리며 소고기를 사 오라고 심부름시켰다. 외할아버지께서는 막내딸이 버무린 육회를 조심스레 한 점씩 집어 입에 넣 뒤 솜사탕 먹는 듯한 표정으로 오물오물 씹어 꿀꺽 키고 잔을 비웠.

아버지, 한 병 다 드시지 마요.
절반은 남겨 놓고
다음에 또 오셔서 드세요.

 

 할아버지 돌아가는 길도 헤맬까 봐 염려하는 엄마의 마음을 할아버지도, 나도 읽었다.  




 외할아버지는 5남 3녀 중 막내딸인 엄마를 유난히 아꼈다. 엄마는 스물다섯 넘도록 태권도 도복을 펄럭이며 다니던 말괄량이 아가씨였다. 이런 딸을 시집보내면 하루도 못 지나 소박맞을 것이 분명하니 평생을 데리고 살 거라고 했다는 할아버지 말씀을 전해 들으며, 어린 마음에도 할아버지가 엄마를 누군가에게 내어주기가 어지간히 싫으셨구나 싶었다. 그런 엄마가 형부, 그러니까 나의 이모부들의 주선과 성화로 선을 보고는 덜컥 결혼했다. 할아버지도 사위들은 어려웠나 보다.


 엄마에게 ‘아빠와’ 결혼을 결심한 이유를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두 분이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가 하숙집에 초대했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는데, 아빠가 당황하며 작은 방을 걸레로 훔치더란다. 그 모습에 엄마는 애잔함을 느꼈다고 했다. 이 사람은 내가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이건, 실은 내가 우리 신랑 자취방 처음 갔을 때 들었던 생각이다.)


 다른 형제들은 풍요롭게 살아가는 반면, 가장 사랑하 딸이 단칸방에서 고생하며 사는 모습 부모 입장에서는 속상했을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우리가 멀리 이사 가기 전까지 그 뒤로도 몇 차례 더 우리 집에 방문했는데 그때마다 별다른 말씀 없딸이 만든 육회를 곁들여 소주잔만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었음에도 내가 외할아버지와 대화 나눴던 기억은 전혀 없다. 나는 원래 할아버지는 말씀이 없는 내성적인 분이로구나 생각했는데, 언변뿐 아니라 풍류 가무에도 능하셨다는 외숙부들의 말씀을 들으며 속으로 꽤 놀랐다.




 지난 금요일 저녁. 남편이 아버님 모시고 장어집에 가자고 했다. 아버님과 만나자고 해도 언제나 미루거나 꺼려하는 남편이기에 의아해서 이유를 물었다. 저번 주말에 아버님을 집에 모셔서 돼지 등갈비찜을 해드렸는데, 감기로 인해 기력이 쇠한 모습을 뵙고는 마음이 쓰였나 보다. 몸보신시켜드리고 싶다고 쑥스러운 듯 말을 꺼내는 남편에게 좋은 생각이라고 답했다.


 결혼 전까지 아버님과 겸상해 본 적이 없다는 남편은 언젠가 술에 아주 많이 취해 아버님에 관해 절규에 가까운 쓴소리를 내뱉은 적이 있다. 그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이러한 남편이니, 아버님과 함께 있으면 그 어색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버님과 장어구이를 앞에 두고 둘러앉았다. 불판이 놓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버님과 그 사이에는 겨울철 시베리아 기가 흘렀다. 노릇노릇한 장어구이로 배가 채워질 무렵 남편이 입을 열었다.

장어탕도 드셔보세요.
원기 회복에 좋아요.


 남편이 장어탕에 밥을 말아 아버님께 내밀었다. 그가 지난 시절 상처로 얼룩진 허물을 벗고 어른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산책하자는 내 제안을 남편이 받아들였다. 의외였다. 식사 때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말 없이 긴 산책을 마치고 아버님과 헤어졌다. 아버님도, 나도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인사 나눴으나, 남편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다. 큰 산 하나를 넘은 우리 신랑이 기특하다. 아버님께 장어와 장어탕을 대접한 남편의 마음은 엄마가 외할아버지에게 육회를 무쳐드린 마음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아들이 건넨 장어탕을 정성껏 떠 드신 아버님도 그렇게 여기실 것이다.






 친정엄마가 사위에게 차려 준 생일상. 여기에도 육회가 놓여 있다. 엄마는 육회를 만들 때면 외할아버지를 언급한다. 엄마에게 육회를 버무리는 시간은 사랑을 재현하는 시간이다. 사위는 장모가 베푸는 푸짐한 사랑을 넙죽넙죽 받아먹으며 원가족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의 힘을 키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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