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자존감
집 근처 도서관에 어린이를 위한 무료 미술 프로그램에 아들 이름으로 신청했다. 며칠 뒤 도서관에서 초대장이 날아왔다. 그 안에는 ‘내가 가장 행복했던 때’에 대해 생각해 보고 오라는 미션지가 들어있었다. 원이가 가장 행복했을 때는 언제일까? 나도 궁금해졌다. 아이에게 묻자, 잠시 고민하더니 답했다.
“엄마 아빠가 처음 바이올린 사줬을 때!”
"3년 전, 그러니까 다섯 살 적 일이 생각나니?”
“며칠 전 방 정리할 때 그 바이올린 보고 기억났어요. 그때 진짜 진짜 좋았거든.”
아이가 다섯 살 때, 어린이집 특별활동으로 바이올린 수업이 있다는 소리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사진 속 아이들은 꽤 그럴듯한 자세로 바이올린을 들고 활을 켜고 있었다.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원이는 틈만 나면 바이올린을 사달라고 졸라댔다. 망설이다가 중고 용품 거래 사이트에서 작은 바이올린 한 대를 사줬다. 아이는 바이올린을 받아 들고는 팔짝팔짝 뛰며 기뻐하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활을 그어 끽끽 소리를 냈다. 자기 키와 그리 차이 나지 않는 길쭉한 바이올린 케이스를 메고 낑낑대며 돌아다니기도 했다. 조금 저러다 흥미를 잃겠지 싶었으나 바이올린에 대한 사랑은 날로 더해졌다. 결국 아이가 여섯 살 되었을 때 집 근처에 사는 대학생에게 바이올린 레슨을 맡겼다.
갓 대학에 입학한 솜털이 보송보송한 선생님은 꼬맹이와 작은 바이올린을 무척 귀여워했다. 레슨 첫해, 원이는 그 여린 어깨에 바이올린을 괴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30분 레슨 시간 동안 바이올린 연주 시간은 5분 남짓 될까 하는 정도였다. 레슨비를 생각하면 이게 과연 잘하는 일일까 싶었지만, 선생님이 들려주시는 바이올린 선율 속에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어린이집 외에 사교육을 받지 않는 아이에게 나름 호사스러운 교육의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고, 선생님은 입시생 레슨을 이유로 아이와 작별을 고했다. 그렇지 않아도 선생님의 방문이 일하는 엄마에게는 여러모로 부담됐던 터라, 아이를 학원에 보내기로 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입소문이 자자하고, 선생님의 스펙이 화려한 곳을 찾아갔다. 학원생들은 외국 학생들과도 교류할 기회도 주어진다고 했다. 마침 초등학생 1, 2학년 아이들의 합주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군대 관현악단 지휘자처럼 카리스마가 넘쳤는데, 아이들의 조그마한 실수에도 소리를 질렀다. 학원 안에는 끊임없이 천둥이 치는 것만 같았다. 잔뜩 주눅 든 아이들이 바지에 오줌을 싸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수업이 진행될수록 원이는 눈을 연달아 찡긋거리는 틱 증상을 보였다. 지켜보던 나 역시 가슴이 쿵쾅거렸다. 수업이 끝난 뒤, 다그치듯 아들의 신상 정보를 캐묻는 선생님께 황급히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집 근처 음악 학원이었다. 피아노 전문 학원이지만 바이올린 전공 선생님도 근무한다고 했다. 학원에 들어선 순간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꼬불꼬불한 복도를 중심으로 양쪽에 작은 방들이 쭉 늘어서 있는 게 마치 개미굴 같았다. 방마다 피아노 한 대가 놓여있었는데 사람이 들어가면 과연 문이 닫힐까 싶을 정도로 비좁았다. 창문도 없었다. 효율을 중시하는 곳임이 느껴졌다. 부원장쯤 되는 선생님이 나를 보며 속사포같이 빠르게 설명했다.
“어머님, 이곳은 진도를 아주 시원시원하게 빼 드려요. 어머님께서 원하시는 대로요.”
수학학원에 잘못 들어온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든 순간, 뚱땅뚱땅 피아노 건반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인터넷으로 잘 검색도 되지 않는 작은 바이올린 학원이었다. 중학생처럼 앳되 보이는 남자가 문을 열고 맞아줬는데, 학원을 운영하는 선생님이었다. 침착하고 차분한 말투로 아이에게 바이올린 활을 그어보도록 했다. 이어 아이의 자세를 교정해 주더니, 아이에게 몇 가지를 가르쳐 주었다. 그 외 특별한 설명도 자랑도 없었고, 조용히 명함만 건네주셨다. 학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원이는 여기에 다니겠다고 했다. 아들은 현재, 일 년 넘게 이곳에서 배우고 있는데, 슬럼프 없이 스즈키 4권을 마쳐가고 있다. 아이가 선생님과 바이올린 수업을 하는 장면을 보면, 대화 없이도 마음이 통하는 결이 비슷한 친구들 같다. 선생님과 음악을 통해 입 무겁고 내성적인 아이가 마음과 정서를 풀어내며 성장하고 있음에 감사하다.
아이가 도서관 미술 프로그램에서 작품을 만들어 왔다.
조물조물 점토를 주물러 만든 바이올린 곁에 ‘행복했던 날’과 ‘정말 멋져!’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내심 기대하며 아이에게 질문했다.
“뭐가 멋지다는 걸까?”
“내가 멋지다고요.”
“뭐? 바이올린이나, 엄마 아빠가 아니고?”
아이가 황당해하며 답했다.
“아니, 바이올린을 켠 건 나니까, 내가 멋지지!”
답을 듣고는 잠시 멍하니 생각하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네 말이 맞네."
잠든 원이 이마에 손을 얹고 기도한다. 스스로를 세워나가되,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감사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건강한 모습으로 그들과 공존하길.
아이 방을 나와 거울 앞에 서서 원이가 한 말을 나도 되뇌어 본다.
정말 멋져.
202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