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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비 Jan 01. 2025

나는 초현실주의 그 자체다

살바도르 달리

AI로 재탄생한 초현실주의 그 자체 달리, DALL-E


오픈 AI가 개발한 이미지를 생성하는 기계 학습 모델의 이름은 수많은 유명 화가들 중에서도 살바도르 달리를 선택했다. 시계가 녹아내리는 그림으로 유명한 초현실주의자 살바로드 달리의 이름과 픽사 애니메이션 로봇 캐릭터 월-E가 합쳐져 만들어진 이름 ‘DALL-E’는 2021년부터 현재까지 3가지 버전이 나오며 더욱 사실적인 이미지를 생성해 내고 있다.


꿈같은 초현실주의 작품과 이중 이미지, 상징적 이미지들을 창조해낸 달리의 창의성과 동시에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는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 로봇 캐릭터 ‘월-E’가 합쳐진 것이다.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캔버스에 유채, 24.1×33cm, 1931, 뉴욕 현대미술관


“나는 초현실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초현실주의 그 자체다.”


자기 자신을 언제나 천재 혹은 초현실주의 그 자체라고 말한 달리는 그의 말처럼 초현실주의의 대표적 상징이 되었다. 자기 자신의 탁월한 재능을 확신하다 못해 지나친 나르시시즘 같은 이 발언들은 실제로 오늘날까지 초현실주의 그 자체, 나아가 AI로 재탄생한 초현실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달리의 넘치는 자신감 너머 잠재된 자기 확신의 암시는 타인의 애정을 갈구하던 가장 깊은 무의식적 콤플렉스에서 비롯됐다.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온전한 나 자신임을 평생에 걸쳐 증명해야만 했다. 



나는 죽은 자의 대체품이었다


살바도르 달리는 1904년 5월 11일 스페인 동북부 지방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달리의 아버지는 예술에 관심이 깊었고, 중산층 집안으로 예술가로서 비교적 좋은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달리의 이름은 그가 태어나기 몇 년 전 어린 나이에 죽은 형과 같았다. 달리의 부모님은 죽은 아들의 사진을 방에 걸어두었고 달리는 그 사진을 보는 것을 무척 두려워했다. 형의 사진은 죽은 사람의 대체품이라는 강박과 죽음에 대한 이미지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나의 죽은 형의 삶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나의 형은 나의 부모님에게 지울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나의 어린 시절의 유일한 목적은 끊임없이 부모님에게 관심을 끌며 나만의 온전한 권리를 찾고자 한 것이다.”


살바도르 달리, <고독, 인간의 형체를 한 메아리>, 캔버스에 유채, 36×26cm, 1931, 개인 소장


유년기의 아이에게 부모는 세상의 전부다. 그렇기에 달리는 부모님에게 자신이 죽은 형이 아닌 달리 나 자신, 그 자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부단히 노력해왔다. 죽은 자와의 섀도복싱, 비이성적인 생각, 확증 편향, 부모님 사랑에 대한 결핍 속에서 비뚤게 자리 잡은 자아상은 초현실주의라는 세계를 활짝 연 원동력이 되었다. 


미친 사람,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평생에 걸쳐 그가 보여준 파격적인 예술은 자기애를 넘어 달리라는 본인의 존재가 실존하는지를 계속 확인하는 의식과도 같았다. 죽은 사람의 대체품이 아닌 과대망상증으로 살아 숨 쉬는 나 자신, 나 달리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바도르 달리, <내 아버지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90.5×66cm, 1920, 갈라-살바도르 달리 제단, 피케라스.


힘센 거인, 험악하고 권위적이며 독단적인 사랑, 아버지


죽은 형의 망상과도 싸워야 했으나, 아버지와의 관계 또한 달리에게는 맞서 싸워야만 하는 강박 중 하나였다. 학교생활과 공부에는 큰 관심이 없는 달리는 복도에 걸려있는 밀레의 <만종>을 베껴 그리거나 소묘에만 몰두했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아버지의 억압적인 태도에 주눅이 들었다. 자기 존재에 대한 죄책감과 동시에 아버지에 대한 표출될 수 없는 불만과 불안은 아버지를 부정하면서도 아버지처럼 강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달리는 메뚜기를 무서워했는데, 이는 달리 작품에서 메뚜기는 아버지에 대한 상징이 되었다. 어린 시절 달리를 골려주기 위해 아버지는 메뚜기를 잡아 달리의 목에 올려놓았고, 메뚜기의 축축한 감촉에 놀라 달리는 기절하고 말았다. 이후 달리는 메뚜기와 그 관련된 모든 연상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게 되었다. 


반대로 어머니는 달리를 무척 아끼고 과잉보호했다. 아이가 저지르는 모든 기행에 관대했고 맹목적인 사랑으로 돌보았던 어머니의 과보호는 달리를 더욱 편집적인 성격으로 만들었다.


18살 때 마드리드 미술학교에 입학했지만 학교의 수업에 만족하지 못하고 피카소의 큐비즘을 터득하며 초현실적이고 기하학적인 실험을 진행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달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어머니는 여전히 달리를 감쌌다. 


결국 아버지와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만난 유부녀 갈라와의 관계와 ‘어머니의 초상화 위에 재미로 침을 뱉는다’라는 부도덕적인 달리의 기행에 달리의 아버지는 절연을 선언했다. 달리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조금 잘라 편지와 함께 흙 속에 묻으며 ‘힘센 거인, 험악하고, 권위적이고, 독단적인 사랑’의 아버지와의 길고 힘들었던 관계를 정리했다. 


살바도르 달리, <리가트 항구의 성모>, 캔버스에 유채, 48.9×37.5cm, 1949, 미국 밀워키 페트릭 베아트리체 미술관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갈라


1929년, 25살의 달리는 파리에서 폴 엘뤼아르의 아내 갈라를 만난다. 갈라는 달리 보다 10살 연상의 여인으로 달리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보았다. 갈라를 만남으로써 달리는 자신을 과하게 돌보던 어머니의 품을 다시 되찾았고, 편집병적인 변덕스러운 환상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그의 환상적 방랑과 만성적인 정신착란증은 실재적이고 완전한 대상으로 예술로 표현되게 되었다. 


두 사람은 파리에서 열린 달리의 개인전 중 동반 도주한다. 갈라는 달리가 그린 <기억의 지속>을 미국 뉴욕의 초현실주의 클럽 전시회에 내놓게 되고, 최고의 화제작이 되며 달리의 이름은 위대한 초현실주의자의 동의어가 된다. 달리는 부와 명예, 갈라까지 손에 꽉 쥐게 되지만,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갈라는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라는 것을.


두 사람은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이탈리아로,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는 미국으로 갈라와 피신을 하며 지내다 스페인의 카데케스 인근의 해변에 궁전 같은 빌라를 건축했다. 갈라는 달리가 언론에 이목을 끌며 고액의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작업을 계속하기를 원했다. 달리는 기꺼이 갈라가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자신의 이름 스펠링을 바꿔 ‘아비다 달러스’ 즉, 달러에 걸신들린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많은 돈을 벌었다. 


갈라는 달리가 벌어오는 많은 돈으로 자신만을 위한 성을 샀고 젊은 남자들과의 밀회를 마음껏 즐겼다. 노년이 될수록 더욱 심해진 남성 편력은 57살의 나이 차가 나는 새로운 애인에게까지 손을 뻗쳤고 이번만큼은 달리도 참지 않았다. 두 사람은 격한 싸움을 자주 벌였고, 신경쇠약에 걸린 달리를 위해 많은 신경제 약들을 다량 투여했다. 나의 구원자, 나의 어머니, 나의 뮤즈는 결국에는 인생을 망치고 무너뜨렸다.


살바도르 달리, <나르시스의 변모>, 캔버스에 유채, 50.8×78.3cm, 1937, 데이트 미술관


나는 초현실주의 그 자체다


88세의 갈라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치매 증상을 보이던 달리는 삶의 의지를 잃었다. 먹기를 거부하고 아이처럼 매일을 울었다. 갈라가 떠나고 6년 동안 병석에 누워 갈라를 찾으며 보내다 1989년 1월 23일 84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천재적인 재능과는 별개로 생전의 달리의 행동은 악명 높았다. 길 건너기와 지하철 타는 것을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으며 조커처럼 웃음을 터트리는 등 해괴망측한 행동을 일삼아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그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늘날까지 가장 유명한 초현실주의 화가가 누구냐고 했을 때, 살바도르 달리의 이름이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은 ‘나는 초현실주의 그 자체다’라고 선언하던 그의 자기 암시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자의 슬픔, 자기 자신임을 증명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내면의 결핍은 이중적 이미지와 교묘하게 뒤틀린 편집광적 시선으로 드러내며 20세기의 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결핍은 결국 달리에게 있어서 초현실주의 그 자체가 되게 하는 동력이었다. 달리가 그렇게 원했던 증명하고자 했던 삶을 통해, 때론 결핍을 극복하기 위한 자기 암시는 가장 나다운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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