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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비 Dec 25. 2024

사람을 위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다

알폰스 무하

크리스마스의 기적


크리스마스는 그 자체로 특별한 아우라를 지닌다. 스크루지 영감이 자신의 미래를 보는 환영을 보면서 삶이 바뀌기도 하고 캐럴의 가서처럼 빨간 코의 왕따 루돌프가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피터래빗 시리즈에서도 은혜 입은 생쥐들이 몸이 아픈 늙은 재봉사를 위해서 자수와 바느질을 해 멋진 옷을 크리스마스에 완성한다. 


기적이란 언제 찾아올 수 알지 못하지만 왠지 모르게 크리스마스에는 하나쯤 찾아오는 것이 낭만적인 일인 것만 같다. 괜스레 들뜨는 마음이 드는 건 반짝이는 조명과 화려한 트리 장식뿐만이 아니라, 어쩐지 인생에서 한 번쯤은 이 시기에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일 것이다. 


아르누보의 화가 알폰스 무하에게도 1894년의 크리스마스는 기적의 크리스마스였다. 연말 휴가 시즌이기에 직원들이 모두 휴가로 자리를 비운 인쇄소,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것은 외국인 노동자였던 알폰스 무하였다. 타국에서 생계와 학업을 유지하고자 그리운 고향과 가족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쓸쓸하면서도 서러운 시간 속 지키고 있던 직장은 ‘르 스틸 뮈샤’, 무하 스타일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는 계기가 됐다. 


알폰스 무하, <사계>, 1896, 패널 위의 오일, Art Renewal Center Museum


출처: 위키백과


자네는 재능이 없어


알폰스 무하는 1860년 7월 24일 체코 남모라비아 지방 소도시 이반치체의 넉넉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무하의 조국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무하가 7살 때 체코, 슬라브 민족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지배를 받았다. 


빈의 귀족 집안 가정교사였던 무하의 어머니 아말리에는 어느 날 꿈에 가련한 고아들을 돌보라는 계시를 받고, 이후 중매에서 아버지 온드르제이 무하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무하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과 미술을 즐겼다. 한 번은 벌로 장롱 뒤에 가서 서있어라는 아버지의 말에 장롱 뒤에 그림을 그려 가족들을 놀랜 적도 있다. 아이의 몸으로 커다란 장롱을 그림으로 가득 채운 행위, 인생 말년에 다가올 벽화 작업의 첫 시작이었다. 


1878년 18살 청년이 된 무하는 프라하 조형예술아카데미 면접을 보았다. 결과는 탈락이었다. 심사위원은 단호하게 “자네는 재능이 없어. 다른 일을 알아보게.”라고 했다. 심사를 봤던 인물은 훗날 알았을까? 파리 광고계의 러브콜을 무수히 받을 사람이자 체코의 자부심이 되는 국민화가가 될 무하를 재능이 없다고 나가라고 했다는 사실을. 


알폰스 무하, <지스몽다>, 1894, 석판화, 216x74.2cm, 개인 소장


눈 떠보니 슈퍼스타, 포스터 오픈런


고향 인근에서 귀족들 초상화를 캐리커처로 그려 팔며 간간이 입에 풀칠을 하던 무하에게 첫 후원자가 생겼다. 칼 쿠헨 벨라시 백작은 무하를 자신의 성 프레스코화 인테리어를 맡긴 후 매우 만족스러워 뮌헨으로 가 미술을 배울 수 있도록 후원했다. 


드디어 제대로 된 배움의 기회가 온 무하는 1885년 뮌헨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하여 미술 교육을 받고, 1887년에는 예술가들의 도시 파리에 입성한다. 문제는 언어였다. 프랑스어를 할 줄 모르는 무하는 미술 공부를 하면서 동시에 언어도 부지런히 익혀야 했다. 그 바람에 백작에게 완성된 그림을 보내지 않고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늦장을 부려 백작의 후원마저 곧 끊겨버렸다. 이젠 생계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외국인 노동자 신세였던 무하에게 1894년의 크리스마스는 특별한 해였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가 자신이 출연하는 작품 <지스몽다>의 포스터가 맘에 안 드니 다시 해오라고 매니저를 인쇄소로 보냈던 것. 연말 휴가철 아무도 없던 인쇄소에 홀로 있는 청년 무하를 보고 울며 겨자 먹기로 매니저는 물었다. 


“자네, 이거 할 수 있나?”


이미 몇 년 전부터 극장이나 잡지사에서 일러스트레이션 작업도 충분히 해왔고 수많은 의상을 보며, 인기스타 여배우 베르나르를 보고 상상해왔던 무하에게 드디어 실전의 기회가 온 것이다. 12월 30일, 세로로 된 거대한 포스터를 제작해 보이자 매니저는 기겁을 했다. 처음 본 스타일의 만화 같은 그림, 심지어 너무 길어서 두 개로 나눠서 인쇄한 포스터를 받은 매니저는 생각했다. ‘망했다, 난 죽었다.’ 그러나 포스터를 본 베르나르는 그 자리에서 바로 무하를 전속 아티스트로 계약했다. 


포스터를 붙이고 난 다음 날, 눈을 떠보니 무하는 파리 광고계의 슈퍼스타가 되어 있었다. 추가 인쇄 후 새벽 거리에 포스터를 붙이기 무섭게 시민들은 너도 나도 포스터를 떼어 갔다. 


알폰스 무하, <슬라브 민족 원래의 고향>, 1912, 캔버스에 템페라, 610×810㎝, 프라하 국립미술관


각 민족에는 고유의 예술이 있다


무하는 하룻밤 사이에 광고계에 러브콜이 쏟아지는 인기 화가가 되었다. 각종 광고와 무대 장식, 포스터 등 작업 문의가 쏟아졌고 무하 스타일이라는 표현이 생겨날 정도로 무하의 그림은 하나의 신드롬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무하의 미술은 이류 미술로 폄하되었다. 장식적이고 현실성과 동떨어진 상업적 예술, 단순히 이쁘기만 한 포스터 장식품에 지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고 고국인 체코에서는 무하를 인정하지도 않았다. 체코 예술가가 아닌 프랑스 예술가 취급을 받았던 무하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오스트리아 홍보 포스터 작업을 맡게 된다. 종속된 슬라브 민족들의 자유에 대한 희구를 부각시킬 수 있는 기회였다.


상업미술에서 순수미술에 전념하고 싶었던 무하는 베르나르와의 계약도 끝이 나자 미국으로 후원자를 찾아 떠난다. 슬라브 민족의 신화와 역사의 발자취를 파노라마처럼 그려내고 싶은 욕망과 프랑스의 인기 화가가 아닌 체코의 역사 화가가 되고 싶다는 무하는 계속해서 질문했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의 뿌리는 무엇인가?


“각 민족에는 고유의 언어가 있듯이 고유의 예술이 있다. 민족의 전통은 한 예술가의 자산이 아니라 전체 커뮤니티의 자산이다.”


미국을 드나들며 루스벨트와도 친분을 나누고 세계 최고의 장식미술가라는 타이틀로 활동하며 티파니 사와도 콜라보를 진행할 정도로 인기를 얻었지만, 점점 아르누보라는 장식미술은 한물간 예술로 인식되었다. 1904년에 출발한 미국행은 7번째 방문인 1920년이나 되어서야 무하가 추구하는 예술성에 대중들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소수만을 위한 예술이 아닌, 대중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여 예술이 소통의 수단이라고 믿던 신념을 타국에서 인정받는 순간이 온 것이다. 


알폰스 무하, <슬라브 민족의 역사 찬미>, 1926-28, 캔버스에 템페라, 480×405㎝, 프라하 국립미술관


나는 사람들을 위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길 바란다


1910년 고국을 떠난 지 30년 만에 무하는 체코로 영구 귀국한다. 금의환향을 받은 무하는 아름답고 몽환적 성향을 버리고 상징주의적 기량을 펼칠, 그토록 갈망하던 사람을 위한 예술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무상 혹은 최소한의 재료비만 받으며 프라하 시민회관 시장 홀 작업, 공공예술, 지폐 디자인, 우표 등을 제작한다.


1913년 무하는 러시아의 발칸반도를 답사하며 슬라브 서사시 연작으로 이어간다. 체코 민족과 슬라브 민족의 옛이야기와 미래의 비전이라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소외받은 대중들에게 당신이 주인공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일을 평생의 소명으로 여겼으며 그 소명을 마침내 이뤄낸 것이다. 


“나는 예술을 위한 예술보다는 사람들을 위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길 바란다.”


그러나 이 노장의 소명과는 역사는 가혹하게 흐른다. 슬라브 민족에게 희망과 동기를 부여하는 그림을 나치가 가만둘 리 없었다. 나치는 여든 살이 넘은 무하를 수차례에 걸친 고문 후 석방했고, 결국 1938년 고문으로 망가진 몸에 폐렴까지 겹쳐 세상을 떠나게 된다. 나치의 강력한 금지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무하의 장례식에는 거의 10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거리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전시장이 될 것이다.”라던 말처럼 무하는 예술을 일상으로 끌어들이는 데 기여했다. 단지 시대를 잘 타고나 어쩌다 기적을 잘 만나 거저 이룬 예쁘기만 한 예술이 아니다. 대중들은 알아본 것이다. 자신의 민족에 대한 애틋함,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삶을 위한 예술을 하길 원하던 무하의 바람을. 크리스마스에 시작된 기적은 한 민족과 시대를 넘어 오늘날까지 사람과 삶을 위한 예술로 남아 있다. 


현재 마이아트뮤지엄에서 진행 중이 전시 중에서, 무하 그림,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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