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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비 Dec 18. 2024

나는 눈을 쉬게 하는 안락의자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

앙리 마티스

색이 주는 무의식적 잔상들


미술치료의 일부로 쓰이는 색채심리학에 따르면 색에는 깊고 본능적인 연결고리가 있어, 특정 색이 무의식적 방아쇠처럼 작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은 과학계에서는 그 정당성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인구통계학적 요인이나 성장 배경, 사회적 환경 등 변수 요인이 너무 많아 타당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색이 주는 감정과 심리적 기제는 이중적인 혹은 다중적이다. 영화 <스타워즈>에서는 평화의 수호자 제다이의 광선검은 녹색으로 평온함을 상징하고 빌런 다스베이더의 광선검은 빨간색으로 분노와 충동, 폭력을 상징한다. 그러나 영화 <그린나이트>에서의 녹색은 부패의 색이고, <쉰들러 리스트>의 빨간색은 인간의 존엄성의 색이다. 


앙리 마티스, <붉은 화실>, 캔버스에 유채, 181×291.1cm, 1911, 뉴욕 현대미술관


색채의 혁명가로 불린 앙리 마티스의 작품을 보면 색이 주는 무의식적인 잔상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같은 주제를 그리더라도 색의 표현에 따라 그 역동이 달라지는 것을 마티스의 그림에서 느낄 수 있다. 


모든 것을 피처럼 붉은색으로 점칠한 <붉은 화실> 작품은 강렬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바닥인지 벽인지 알 수 없는 평면적인 공간은 혼란스럽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작품 안에 있는 피사물들이 움직이는 것 같다. 활기차면서도 어딘가 불안정한 붉은색에 대해 마티스는 이렇게 말한다. 


“붉은색을 어디서 가져왔냐고? 솔직히 말해서, 나도 잘 모르겠네.”


출처: 위키피디아


더 빨리, 더 많이 일해!


앙리 에밀 브누아 마티스는 1869년 12월 31일 동북부 프랑스 지역에서 태어났다. 잿빛의 우중충한 하늘, 탁한 공기, 전쟁 중 습격에 취약한 알려지지 않은 지역, 산업화로 인해 숲은 사라지고 공장의 염료와 폐기물 냄새가 뒤섞인 음산한 도시. 마티스는 아버지의 종묘 가게를 도우며 자랐다. 


아버지는 마티스와 남동생에게 일을 할 때면 아주 냉혹하게 굴었다. “더 빨리, 더 많이 일해!”라고 소리를 질러댔고 마티스는 자주 집에서 도망치는 꿈을 꾸었다. 가끔씩 마을에 서커스단이 방문하여 형형색색의 마법과 같은 세상을 마주하면, 마티스는 혼자만의 공상 속으로 들어갔다. 함께 있던 남동생 에밀도 금방 세상을 떠나자 그의 유일한 친구는 상상 속의 금붕어들과 서커스에서 보았던 이국의 새들이었다. 


마티스는 결코 아버지의 폭력을 잊지 않았다. 어떻게든 가게를 벗어나고자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 공부를 하고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했다. 재밌는 일은 아니었다. 점점 지루함을 느끼며 삶이 시들어갈 때쯤, 건강도 함께 시들었다. 악화된 건강으로 1년간 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무료한 삶을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했다.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는 어머니가 물감 세트를 선물받은 그 순간, 마티스는 이것만이 자신이 이 지긋지긋한 도시를 떠날 수 있는 운명임을 직감했다.


“물감이 가득 들어있는 박스를 손에 들자마자, 나의 운명이라고 느꼈다. 마치 먹잇감을 향해 돌진하는 맹수처럼 나 자신을 내던졌다.”


앙리 마티스, <마티스 부인의 초상: 초록의 선>, 캔버스에 유채, 40.5×32.5cm, 1905, 덴마크 국립미술관


실력 없는 몽상가, 마을의 멍청이 


기껏 법 공부까지 시켰더니, 그림 그리는 화가가 되겠다는 마티스를 마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22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률 공부 대신 파리의 쥘리앙 아카데미에 들어가게 된다. 아버지를 실망시켰다는 사실은 평생의 풀지 못할 숙제처럼 마음에 자리 잡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마티스를 실력 없는 몽상가, 현실적이지 않은 어설픈 그림, 마을의 멍청이로 불렀다. 


그러나 단순히 멍청이라고 하기엔 마티스는 근면 성실한 사람이었다. 파리에서 공부 중 상징주의 화가인 귀스타브 모로의 눈에 띄게 되고 그의 화실에 나가 비공식적인 수업을 받으며 제자로 인정받는다. 살롱전에 그림을 출품하여 프랑스 정부로부터도 지원금을 받는다. 


당시 유럽의 미술은 인상주의에서 한 단계 넘어가고 있었다. 세잔과 고갱, 쇠라, 고흐 등 다양한 화가들이 색채의 형태를 파괴하고 있었고 시각적인 환영보다 예술가의 내적인 측면을 나타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존의 양식에서 색채를 해방시키고자 거칠게 채색을 하고 강렬한 원색을 표현하며 소재와는 관계없는 심리적 색채를 모색하기를 원했다. 


이런 거친 형태와 색상을 본 비평가 루이 보셀은 ‘야수들의 우릿간’라고 빈정거렸고 매년 열리는 살롱 도톤에 모여 마티스의 그림을 비웃었다. 야수파라는 별명을 지닌 또 한 번 자신의 마을의 멍청이로 전락한 마티스는 굴욕감을 느꼈다. 


앙리 마티스, <춤>, 캔버스에 유채, 269×391cm, 1910, 예르미타주 미술관


나는 지친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면서 평화를 찾길 바란다


마티스는 북아프리카와 새로운 동방세계를 여행하면서 장식적인 미술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우연히 걷던 거리의 고물상 안에서 발견한 패턴 무늬가 그려진 리넨 천을 보고는 천의 무늬를 배경으로 사용하면서 장식 미술의 단계로 접어든다. 


당시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이 인기를 얻고 있었는데, 그의 철학은 움직이는 세상에 대한 환희를 이야기했다. ‘기억은 과거를 현재로 연장시킨다’는 생의 비약(치밀어 오르는 식물 같은 삶의 힘)을 이야기하는 베르그송의 주제는 마티스의 그림에 큰 영감을 주었다. 


삶은 움직이는 것이며 도약하는 것이라는 주제에 맞게 줄기를 뻗는 듯한 덩굴의 표현과 기쁨의 원색을 사용한 그림은 장식적인 그림에 대해 호의를 보이는 고객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경제적으로 점차 안정을 찾은 마티스는 가족과 함께 교외에 집을 짓고 몇 년 동안 여행을 하면서 지냈다. 


새로운 정원과 집에서 마티스는 <춤>을 완성했다. 둥글게 원을 그리며 춤을 추는 나체의 사람들, 간결한 선들과 리듬감, 거대한 면적, 단순화된 색면까지 벽면의 경계 없이 자유롭게 춤을 추는 것 같은 그림을 완성했다.


“나는 평정과 순결의 미술, 동요하지 않고 혼란스럽지 않은 미술을 찾고 있다. 나는 지치고 긴장하고 낙담한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면서 평화와 고요함을 찾기를 바란다.”


앙리 마티스, <이카루스>, 콜라주, 43.4×34.1cm, 1946,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국립근대미술관


가위는 연필보다 감각적이다


우중충하고 탁한 공기의 고향을 벗어나, 마티스는 거의 평생을 햇살이 비치는 도시들을 찾아다녔다. 스페인, 모로코, 니스, 타히티 등을 거치며 오달리스크와 아라베스크 무늬를 장식적인 색채로 그리는 것을 이어갔다. 

세상은 전쟁 중이었다. 마티스도 입대하고자 했으나 이미 40세가 훌쩍 넘은 그를 군에서는 거부했고 이곳저곳 떠도는 생활을 하면서 전쟁의 불안을 지속적으로 겪어야만 했다. 전쟁은 마티스 내부에서도 일어났다. 암 제거하는 수술과 관절염으로 건강은 악화되었고 간병인이자 모델, 조수의 역할을 해 준 리디아의 문제로 아내도 떠났다. 


무엇보다 붓을 잡을 수 없게 되자 마티스는 채색된 종이를 오리는 컷 아웃 방식을 선택한다. 선과 색 표면과 윤관석이 뚜렷하고 강렬하고 단순한 주제의 본질적인 속성을 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생애 내내 간직했던 베르그송의 ‘기억은 과거를 현재로 연장시킨다’는 생의 비약은 마티스의 삶에서 비로소 꽃피웠다. 


“강렬하고 선명한 이 이미지들은 서커스, 민담, 여행에 관한 기억의 결정이다.”


가위는 연필보다 감각적이라고 할 정도로 마티스는 종이 오리기를 즐거워했다. 과거에서 얻은 삶의 보석들을 하나하나 오려내며 방 안 벽지에 오린 종이들을 가득 매우며 바다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출처 : http://chapellematisse.fr/


나는 눈을 쉬게 하는 안락의자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


1948년, 77세의 나이의 마티스는 로사리오 성당을 디자인하는 가장 야심찬 작업을 시작했다. 예배당 안에 들어갈 스테인드글라스, 타일에 그려질 그림, 그 외의 장식품까지 빛의 조각가가 되어 종이에 색을 칠하고 오리는 것을 반복했다. 


생애의 가장 큰 업적이 될 것이라는 말을 증명하듯 성당은 성공적으로 완성되었다. 4년에 걸쳐 작업한 성당은 1951년 6월 25일에 준공되었지만 마티스는 건강이 악화되어 참석하지 못했다.


1954년 숨을 거두기 전 마티스는 조수 리디아에게 펜과 종이를 달라고 부탁했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모습을 그리고는 말했다. 


“다 됐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림을 그린 그가 원했던 것은 누군가에게 쉼을 주고 싶은 그림이었다. 과거에서 길어온 순간들을 현재로 가져와 그리고 오려서 가장 단순한 형태와 강렬한 색채로 전달하고 싶었다. 색채는 때로는 갈등의 붉은색이었다가도 열정의 붉은색이고, 무력하고 부패한 초록색이었다가도 조화와 안정을 이루는 초록색이고, 우울과 좌절의 파란색이었다가도 바다와 하늘을 떠올리게 하는 평온함의 파란색을 반복한다. 


어디서 온 붉은색인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색은 자신의 내면에서 나온 색이라는 것, 과거의 기억에서 나온 색채라는 것, 나아가 보는 이들에게 쉼과 치유를 주고 싶은 색. 색이 가진 무의식적인 잔상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이지만 마티스의 색들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내가 꿈꾸는 것은 사람을 불안케 한다든지 마음을 무겁게 하는 따위의 주제를 갖지 않는다. 균형과 순수함과 고요함의 예술, 모든 정신 노동자들에게도 하나의 진정제와 같은 예술, 육체적인 피로를 풀어 주는 편안한 안락의자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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