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현비 Dec 04. 2024

나는 창조자이자 창조물입니다

에곤 실레

자신의 민낯을 마주한 적이 있는가


2023년 옥스퍼드 사전이 선정한 올해의 단어는 'Authentic(진정성 있는)'이었다. SNS에서는 매일 수백만 장의 셀피가 올라오지만, 그 속의 이미지들은 모순적이게도 완벽하게 연출된 것들이다. 필터로 보정된 얼굴, 각도가 계산된 포즈, 감성적으로 편집된 순간들. 현대는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을 드러내는 동시에 감추는 데 능숙하다.


최근에는 '가면 우울증'의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한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내면의 고통을 숨기는 이들이 늘고 있다. SNS에서는 해맑은 표정으로 일상을 공유하면서도, 문을 닫은 자신의 방에서는 깊은 고독과 불안에 시달린다.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는 것이 두려워 더욱 완벽한 가면을 쓰고, 그 가면이 무거워질수록 우울은 깊어진다.


100여 년 전, 20세의 한 젊고 잘생긴 화가는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그는 자신의 가장 추하고, 고통스럽고, 적나라한 모습을 화폭에 담아냈다. 뒤틀린 자세, 일그러진 표정, 기괴한 손동작은 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든다. 마치 앞에 놓인 거울을 향해 "이것이 진짜 나다"라고 선언하는 듯하다. 


에곤 실레, <얼굴을 찡그린 벌거벗은 자화상>, 1910, 구아슈, 수채, 연필, 흰색 하이라이트, 55.8×36.9cm, 빈, 알베르티나 미술관


완벽한 가면 뒤에 숨어 진짜 자신을 잃어가는 시대, 그의 자화상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마주할 수 있는가? 그 불편한 진실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는가?



사랑하는 나의 정신 나간 아버지


1890년 6월 12일, 오스트리아 툴른의 작은 기차역에서 에곤 실레가 태어났다. 철도원이었던 아버지 아돌프와 어머니 마리는 반복되는 사산의 슬픔을 극복하지 못한 채였다. 실레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이미 깊은 어둠 속에 있었다. 세 번의 유산 끝에 얻은 아들이었지만, 어머니는 실레를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아버지 아돌프는 매춘으로 인해 감염된 매독을 앓고 있었지만 치료받기를 원하지 않았고 아내에게도 자신의 병을 숨겼다. 이미 사산된 아이들 또한 선천적 매독으로 인해 유산되거나 일찍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아들 실레와는 가깝게 지내던 자상한 아버지였고 실레 역시 툴른에서의 어린 시절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로 기억할 만큼 아버지를 사랑했다.


실레가 15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심해진 매독은 결국 정신 이상 현상을 불러왔다. 직장에서 쫓겨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직면했을 뿐 아니라 철도 채권들까지 모두 불태워버리는 극단적인 행위를 하는 등 가족의 재산을 모두 파괴했다. 아버지의 광기는 통제되지 않았고 결국 마비 증세를 보이며 사망한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사망한 것에 대해 무감각한 반응을 보였으며, 이는 실레와의 더 깊은 갈등으로 이어진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가깝게 지내는 아버지와 닮은 아들을 보며 어머니 마리의 마음속에는 원망과 배신의 감정이 그대로 투영되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다정함 대신 실레는 여동생과의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며 자랐다. 


“늘상 슬픔에 빠져 있던 고귀한 내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지 의문이야.”


정신 나간 아버지, 어머니의 무관심 속에서 실레는 부모의 부재에 적합한 사람을 평생 갈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갈망은 다양한 관계 속에서 차츰 채워졌다.  


에곤 실레, <은둔자들>, 1912, 캔버스에 유채, 181×181cm, 레오폴드 미술관


나는 실버 클림트


실레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본 스승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의 추천으로 실레는 중부 유럽에서 가장 유서 깊은 빈 미술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1906년 16세의 나이로 빈에서 공부하기 시작한다. 


전통적인 회화 방식을 고수하던 아카데미에 점차 흥미를 잃어가던 중, 당시 이미 부와 명예를 다 가지고 있었던 구스타프 클림트가 새로 창시한 분리파 미술을 알게 된 실레는 일부러 클림트 근처를 맴돈다. 클림트는 단번에 이 청년의 천재성을 알아본다. 


클림트는 쭈뼛거리는 실레에게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여러 방법으로 실레를 격려한다. 실레의 드로잉을 구입하고 자신의 그림과 교환하기도 하며 모델과 후원자를 소개해 주기도 한다. 빈 분리파 전시에서는 일부러 실레의 그림을 가장 가운데에 걸기도 하며 실레를 적극 지원 및 홍보했다. 


클림트의 영향을 받아 화려한 색과 기하학적 패턴, 곡선의 표현 등을 사용하며 스스로 ‘나는 실버 클림트’라고 칭했다. 그만큼 클림트에 대한 애착은 아버지의 부재를 채우는 것 그 이상이었다. 


훗날 클림트가 사망하고 난 후의 그린 제49회 빈 분리파 포스터에는 클림트의 자리를 일부러 비워둠으로써 자신의 삶에서 클림트가 아버지이자 스승, 멘토로써 얼마나 굳게 자리 잡고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에곤 실레, <붉은 블라우스를 입고 무릎을 들어올린 발리>, 1913, 수채 물감, 구아슈, 31.8×47cm, 개인 소장


미성년자 납치 사건에 휘말린 순교자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클림트의 도움으로 실레는 여러 전시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비평가들에게는 클림트의 화풍에 영향을 받은 화가로만 지적되었으나, 점차 예술가의 입지를 다지며 스무 살이 됐을 무렵 세 명의 후원자에게 관심을 받게 된다.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자 실레는 빈을 떠나 한적한 곳을 찾아 노이렌바흐에 머문다.


17살 모델인 발리 노이칠과 동거하며 관능적인 나체 스케치를 그리기 위해 어린 여자 모델을 구하는 등 새로운 화실을 차렸다. 아무리 시대가 성에 대해 자유분방한 시대였어도 어린 여자아이들이 화실을 드나드는 것을 본 마을 사람들의 반발이 없을 리 없었다. 


결국 미성년자를 납치한 혐의로 체포되어 ‘부도덕한 그림을 퍼트린’ 죄로 실레는 21일간의 구금, 3일간의 징역형을 받았다. 미성년자를 납치했다는 사실은 오해였기에 무죄로 밝혀졌으나, 실레의 작업실에 걸린 에로틱한 작품들은 포르노물로 취급받아 3일의 형벌을 받았다. 


실레의 구금 소식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빈의 많은 동료 화가들에게 소문이 퍼지고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며, 해외에서는 실레를 고통받는 예술적 순교자가 되어 있었다.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핍박받은 예술적 순교자, 미성년자 납치 사건이라는 억지스러운 법의 잣대에 희생된 순교자로 ‘오해받는 천재 화가’, ‘불우한 시대의 고독자’로 불리며 유럽 무대에 새로운 명성을 얻게 된다. 실레도 이 스캔들에 자신이 박해받은 예술가임을 강조했다. 


“나는 나의 예술과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위해서 이 고통을 이겨낼 것입니다.” 


에곤 실레, <가족>, 1918, 캔버스에 유채, 150×160.8cm, 빈, 벨레데레 궁전


인생에 대한 욕망, 그러나 금세 초래된 파국


미성년자 납치 사건 무렵부터 실레의 옆에는 항상 발리가 있었다. 발리는 누드화에 있어 가장 뛰어난 뮤즈였을 뿐 아니라 매우 헌신적인 여성이었다. 집안의 사소한 일은 물론이고 자신이 그려진 누드화를 구매자에게 전달하는 낯부끄러운 일도 마다 않았다. 투옥 중인 21일 동안 매일 실레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고 위로를 전하며 편지와 과일, 선물 등을 전했다. 자신에게 냉담하고 저주를 퍼붓는 어머니의 빈자리는 발리가 다정함과 헌신으로 채웠다. 


이러한 헌신에도 불구하고 실레는 화목한 가정, 경제적인 풍요에 대한 결핍을 떨치지 못했다. 1915년 작업실 건물 이웃인 여인 에디트와 결혼한다. 에디트는 부유한 집안의 여성이었다. 실레와의 이별 후 발리는 적십자에 간호사로 입대해 전선에 나갔다가 성홍열로 쓰러져 사망하게 된다.


행복한 가정, 신분 상승에 대한 욕망, 경제적 안정까지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는 듯했다. 무엇보다 빈 분리파의 핵심 멤버였던 클림트의 사망과 코코슈카의 망명으로 빈에서 실레는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이제 모든 것을 이루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예술의 꿈을 실현하기만 하면 되었다. 무엇보다 아내 에디트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면서 가정의 축복까지 거머쥔 듯했다. 모든 욕망이 충족되자 어머니에 대한 골 깊은 감정이 옅어지며 점차 여성의 그림도 비틀어진 형태에서 안정되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건강하고 육감적인 모성애를 지닌 그림으로 변했다. 


1918년 10월 스페인 독감은 이 가정을 비켜가지 않았다. 에디트는 스페인 독감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에디트는 당시 임신 6개월이었다. 슬퍼할 틈도 없이 실레도 사흘 후 스페인 독감으로 허망하게 생을 마감한다. 

 

에곤 실레,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 1912, 목판에 유채, 32.3x39.8cm, 레오폴드 미술관 


나는 예술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단 한 점의 자화상을 남기지 않았던 클림트와 달리 실레는 평생에 걸쳐 자신의 뒤틀린 자화상을 300여 점이나 남겼다. 


"나는 창조자이자 창조물입니다. 나는 예술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실레가 남긴 이 말은 그의 짧은 생애를 완벽하게 요약한다. 그는 자신의 몸과 영혼을 해부하듯 관찰하며 20세기 초 인간 존재의 본질적 불안과 고독을 포착했다. 그의 뒤틀린 인체, 날카로운 선, 불안한 색채는 당시 빈 사회의 이면에 잠재된 광기와 욕망을 드러냈다.


오늘날 실레의 작품은 더욱 강렬한 메시지를 던진다. SNS 시대의 완벽한 이미지들 속에서, 그의 적나라한 자화상은 우리에게 진정한 자아와 마주할 것을 요구한다. 그의 예술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단 28년의 짧은 생이었지만, 실레는 예술이 가진 가장 본질적인 힘, 즉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를 우리에게 남겼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전시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에서 찍은 에곤 실레의 작품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