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호퍼
히치콕이 선택한 화가
스릴러의 거장 앨프리드 히치콕의 '사이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외딴 도로변의 베이츠 모텔이다. 어두운 밤, 높은 곳에 자리 잡은 빅토리아풍 저택과 그 아래 덩그러니 놓인 모텔. 이 섬뜩한 구도는 우연이 아니었다. 히치콕은 호퍼의 <철로 옆의 집>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황량하고도 서늘한 그림자 진 건물의 그림을 보고 히치콕은 불안과 공포의 가능성을 읽어냈다.
히치콕이 포착한 것은 호퍼의 독특한 시선이었다. 평범해 보이는 일상 속에 도사린 불안과 긴장감, 고립된 공간이 자아내는 미스터리였다. 영화 '새'의 보디가 학교 건물 역시 호퍼의 '동부의 호텔 방'을 연상시킨다. 두 거장은 모두 평범한 미국의 일상 공간에서 섬뜩한 서스펜스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어린 시절에는 귀신과 괴물이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면 점차 세월이 흐르면서 느껴지는 일상 속에 존재하는 섬뜩함이 있다는 것을 종종 느낀다. 마땅히 무언가가 있어야 할 공간에 아무것도 없는 것은 역설적으로 있어야 할 존재에 대한 부재를 강화시킨다. 호퍼의 그림이 고독을 표현한다고 많은 이들이 느끼는 것은 마땅히 존재했어야 할 무언가가 빠진, 그 어떤 서늘함이다. 히치콕이 선택한 화가, 많은 영화나 광고에도 오마주되는 호퍼의 그림은 능동적으로 고독하다.
환경에 의한 고독
1882년 7월 22일, 에드워드 호퍼는 뉴욕 나이액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나이액은 어업과 조선업이 발달한 강이 있는 위치로 교통이 편리한 도시였다. 부모님은 자주 호퍼를 데리고 강의 맞은편에 있는 뉴욕시에 기차나 페리를 타고 가서 각종 연극과 공연을 관람했다. 덕분에 호퍼는 어린 시절부터 가족들과 함께 자주 독서와 예술을 즐겼다.
아버지 헨리 호퍼는 아들에게 괴테나 셰익스피어의 문학 서적을 읽게 했으며, 어머니는 어린 에드워드에게 스케치북과 미술 서적을 구해주었다.
열 살 때부터 그의 그림에는 이미 특유의 구도가 드러났다. 학교 친구들이 풍경화를 그릴 때도 호퍼는 달랐다. 그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부분적인 풍경, 빛이 만드는 그림자의 형태에 더 관심을 보였다. 교사들은 이런 특이한 시선을 우려했지만 호퍼는 자신만의 관점을 고수했다. 이미 이때부터 자신의 그림에 서명을 하고 날짜를 표기했다.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한 독서광이었던 호퍼는 이미 성향과 집안 환경 자체가 차분하며 지적이었다. 눈에 특별히 띄고 싶은 마음은 없던 내성적인 마음과는 달리 눈치 없게 키가 어느 날 30cm나 커버렸다. 190cm가 넘는 키를 지닌 소심한 학생은 놀림거리가 되기 완벽한 조건이었다. 혼자 있는 것을 선호했던 어린 시절의 호퍼는 이미 고독에 대한 정의를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엄마 아빠 말을 거역하지 않는 범생이, 그 속에 도사리는 내면아이
가족들은 지적이고 예술을 즐기는 사람들이었지만, 예술적인 감각을 사유했다고 해서 경제적으로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조금 기울자, 생활력이 강한 강인한 어머니에 따라 어머니 중심으로 집안의 분위기는 흘렀다. 당시 대세였던 남성 우월주의와는 거리가 먼 가정이었다.
아버지는 호퍼가 화가보다는 삽화가로 경제적인 수입을 얻기를 원했다. 아버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던 호퍼는 그 어떤 즐거움도 느끼지 못한 채 상업 미술학교에 진학하고 디자인과 광고, 삽화 일을 하며 생활했다. 자신의 창의성이나 원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망은 누른 채 수요에 따른 삽화를 그리며 생활을 이어갔다.
24살이 된 호퍼는 프랑스의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 파리는 예술의 중심 도시이자 향락의 도시였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밤 문화로 모였고, 예술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활발하게 주고받으며 유흥을 즐기던 곳이었다.
호퍼만이 예외였다. 어머니가 지낼 수 있도록 마련한 곳은 교회 선교사의 집이었고, 이상한 곳에 빠질까 염려하던 어머니의 말을 따라 얌전히 교회 사람들과 어울렸다. 가장 크고 화려했던 술집 물랭루주에는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대신 파리의 건축물을 관찰하고 센 강을 산책하며 루브르 박물관을 드나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을 거역하지 않던 범생이, 예술의 도시에서 가장 건전하게 공부만 했던 범생이, 큰 키의 말수가 거의 없던 미국인.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저 겉으로 보기엔 순종적인 청년이 가진 성공과 자유에 대한 욕망, 서슬 퍼런 지배욕과 질투를 지닌 내면아이가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보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
파리에서 돌아온 호퍼는 생계를 위해 여전히 광고 삽화가로 일하며 매일 아침 사형 선고를 받는 죄수처럼 출근했다.
“나는 삽화에 그다지 흥미를 못 느꼈다. 하지만 돈을 벌어서 먹고살기 위해서 그 일을 해야 했다. 그게 다였다.”
31살이 돼서야 첫 작품이 하나 팔렸으나, 그 이후로도 10년 동안 단 한 점도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 하기 싫은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아무도 보지 않는 그림을 그렸다. 호퍼의 우울은 어쩌면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미국의 사회는 경제 위기로 대공황이 폭발하던 시기였다. 실업자들은 늘어나면서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인 엠파이어 빌딩이 건설되는 시기였다. 노동자 계급은 점점 더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국가는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위기감은 극에 달았다. 모두가 불안한 시대였다. 호퍼의 그림에서 많은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충분히 불행하고 불안하고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서 소외됐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소외된 화가를 성공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아내 조세핀이 인생에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
에디는 내가 상아탑을 갖는 걸 원치 않아
조세핀 니비슨을 처음 만났을 때, 조세핀은 이미 여러 전시를 하며 그림을 팔고 있던 화가였다. 10년 동안 한 점도 팔지 못했던 호퍼의 그림을 갤러리스트들에게 소개한 사람도 조세핀이었다.
호퍼는 말이 없고 수동적인 사람이었고 조세핀은 끊임없이 떠드는 활발한 사람이었다. 정반대의 성격인 두 사람이 만나 겉으로 보기엔 완벽한 팀워크를 이루었다. 조세핀은 호퍼의 모델이 되었고, 작품 관리를 하였으며, 어떤 사람이 얼마에 작품을 사갔는지를 모두 기록했다. 수채화를 그리도록 조언했고 수채화로 그린 그림을 갤러리스트들에게 소개하고 작품을 파는 것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호퍼의 작품은 드디어 빛을 발하고 팔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원하던 자신만의 예술에 몰두하고 성공의 욕망을 이루면서도 동시에 아내 조세핀의 그림을 경계했다. 어린 시절 부모님 말에 원치 않는 순종을 하고 수동적이었던 내면아이는 아내에게만큼은 지배욕으로 그 공격성을 드러냈다. 아내가 자신보다 더 유능한 화가가 될 것을 항상 두려워했다.
둘은 지나치게 다퉜고 때로는 폭력도 행사했다. 그러나 조세핀은 남편 곁을 지키며 많은 시간을 인내하고 많은 것을 포기했다. 그녀의 일기장에는 자신이 얼마나 그림을 그리고 싶은지, 나가서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은지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 쓰여있다.
“에디(에드워드 호퍼의 애칭)는 내가 상아탑을 갖는 걸 원하지 않는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방해할까 봐. 내가 여전히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나의 감정을 캔버스에 영사합니다
비록 두 사람이 다투고 한 사람의 소유욕에 한 사람이 굴복하는 관계로 치달았지만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았다. 함께 연극과 영화를 자주 보러 갔고 책 읽기와 프랑스어 공부, 뉴잉글랜드 지역을 여행하면서 함께 스케치를 하는 등 두 사람만의 세계를 확장시켰다.
먼 훗날이 되어서야 조세핀의 도움 없이는 자신이 없었음을 회개라도 하듯이 조세핀의 전시를 돕고 함께 무대 인사를 하는 그림을 그리는 등 조세핀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여전히 검소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호퍼는 성공 후에도 인터뷰나 작품에 대한 해석을 하는 것을 꺼렸다. 인간의 고독을 상징하는 그림이라는 말에 그저 과장되었다고 하며 가끔은 조세핀에게 인터뷰 중간에 들어와 달라고 하며 어영부영 인터뷰를 마쳤다.
1967년 5월 15일, 호퍼는 뉴욕의 자택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 이후 조세핀은 남편의 모든 작품과 스케치, 메모를 휘트니 미술관에 기증했다. 호퍼가 세상을 떠난 지 10개월 만에 조세핀도 세상을 떠났다. 평생 갈등 속에서도 예술로 이어졌던 두 사람의 인연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눈 마주침도 없고, 함께 있는 사람도 몇 안 되거나 아예 사람이 부재하는 일상의 덧없음을 포착한 능동적인 고독. 호퍼의 그림엔 무수한 이야기가 있는 동시에 아무 이야기도 존재하지 않으며 결코 알 수 없다. 그러나 호퍼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인간의 고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의 감정을 캔버스에 영사합니다. 모든 답은 캔버스에 있습니다.”
우울하고 고독한, 때론 공격적인 서슬 퍼런 욕망,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자발적인 소외. 그것은 모두 캔버스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